▲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수치와 모멸감이라고 했다. 경영진의 억지와 치졸함에 기가 차고 분노가 치민다고 했다. 말도 안되는 구실을 만들어 징계위원회에 회부됐다는 친구는 몸을 부르르 떨며 분을 삭일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화장실도 맘대로 갈 수 없어 방광염까지 걸릴 뻔한 열악한 근무조건에서 뼈빠지게 일한 대가가 ‘근무태만’이란 낙인을 찍어 정직 2개월이라는 징계를 받았단다.
지나가는 개도 알만한 속내는 노조활동 때문이었다. 실수 같지 않은 실수를 들이대며 인민재판처럼 치러진 징계위원회에서 친구는 생전 처음 치욕을 맛봤다고 했다. 가관인 것은 몇십년 동안 동고동락해온 선배? 동료들이 경영주 옆에서 주구(走狗)이기를 자처하며 ‘죄인’을 사정없이 매도했다는 사실이다. 친구는 배신감에 밤잠을 설치며 지금도 그날의 모멸감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감정은 생각과 행동을 지배해
감정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감정은 생각과 행동을 지배한다. 감정이라는 괴물은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내 생각과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감정에 당혹스럽기만 하다. 니체는 “인간은 행동을 약속할 수는 있으나 감정을 약속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인간관계를 둘러싼 감정은 훨씬 더 변덕스럽다. 내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감정은 이성보다 더욱 집요하고 강력하다. 그것은 중대한 인간사를 좌우하는 핵심이다. 성서는 아담과 이브를 통해 우리에게 부끄러움이란 걸 가르친다. 부끄러움은 수치심을 불러일으킨다. 수치심은 단순한 부끄러움에서부터 치욕에 이르는 다양한 양상을 띤다. 수치심은 때때로 자신과 타인에 대한 잔인함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자살이나 타인에 대한 분노는 수치와 모멸감의 가면으로 간주될 수 있다.
나는 2009년 4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 소환되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이른 아침 차에서 내려 사진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든 포토라인 앞에 서 있는 노 대통령을 TV로 보던 나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카메라 플래시가 사정없이 번쩍거리는 가운데 그의 표정은 형언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분노도, 슬픔도, 침통함도 아니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자존심으로 버티는 안간힘이 보는 이로 하여금 견딜수 없게 했다.
하이에나 같은 보수언론과 이명박 정권, 검찰이 작정하고 물어뜯는 상황에서 노 대통령은 “나는 도덕적으로 비난받을지언정,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국민들의 정서는 냉혹했다. 상대방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거나 없는 사실을 지어내 수치와 모멸감에 이르게 하는 방법은 한 사람의 영혼을 침해하고 파괴할 수 있는 것이다.
#모멸감은 가장 무서운 폭력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2차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의 개인적인 체험기다. 이 책에서 레비는 같은 인간으로서 또다른 인간이 벌레만도 못한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그렸다. 수용소에서 나치는 유대인을 하찮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고 확인하려 했다. 소에게나 새기는 문신을 유대인에게 새기고 가축용 객차에 실어 수용소로 이송되는 포로들은 자신들의 배설물 속에 몇날 며칠을 누워 있어야 했다. 이름대신 사용되는 수인번호, 개처럼 핥아먹어야 하는 배급, 비료로 쓰이는 시신의 재, 실험용 쥐로 이용되다 죽어가기도 했다.
인간의 잔인함은 끝이 없고 정신적 폭력은 물리적 폭력보다 훨씬 고통스럽다. 인간에게는 목숨 이상으로 소중한 그 무엇이 있고, 그것이 손상당할 때 삶의 동기를 상실한다. 그 중에서도 모멸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폭력이다. 사회적으로 볼때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한 고통스러운 낙인보다 더한 게 있을까. 그들은 왜 일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어려운 삶을 살아야 하나. 장애가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정상인’임을 자부하며 혐오와 경멸의 시선으로 장애인을 바라본다.
전쟁터에서 만신창이가 돼 불구가 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나의 아버지. 동네사람들의 ‘상이군인’에 대한 차가운 시선은 두말 할 것도 없었다. 산에 가서 목매 죽어버리겠다는 아버지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우리 가족의 삶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틈만 나면 넋두리를 토해내는 그런 아버지를 보는 게 끔찍해서 난 늘 탈출을 꿈꿨다. 이제 와서 지난날 아버지의 분노와 모멸감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인간이라면 이렇게까지 할 리가 없다’고 생각되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는 1987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인간으로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저버린 과거의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걸까. 친구에게 난 그저 버텨내라고만 했다. 갑과 을의 싸움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걸 무수히 봐왔다. 그래서 친구에게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우리의 모멸감은 앞으로도 건재할 테니까.
우난순 지방교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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