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
목욕탕 가서 목욕하는 걸 꽤 좋아한다. 더구나 추운 겨울 뽀얀 김이 피어 오르는 따뜻한 탕 속에 몸을 담갔을 때의 기분은 뭐라 말할수 없이 짜릿하다. 여행가서도 찜질방에서 자곤 한다. 하루종일 걷고 또 걷느라 녹초가 된 몸을 뜨거운 물에 담그고 얼굴에 땀이 맺혀 흐를 때까지 반신욕을 하고 나면 여독이 싹 풀리기 때문이다.
얼마전 타계한 신영복은 24시간 모든 것이 공개되는 감옥을 “목욕탕처럼 적나라하게 서로의 실체가 드러나는 공간”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목욕탕에선 그 누구라 할것 없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욕탕 밖의 신분에 관계없이 평등해지는 곳이다. 잘난 사람 하나 없는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볼품없는 알몸뚱이들이 등을 맞대고 육신의 때를, 마음의 때를 벗겨내는 이곳이야 말로 삶의 긴장의 끈을 풀어놓을 수 있는 극락 아닐까.
#몸은 인간의 욕망의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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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공간에서도 예외없이 파워게임이 존재한다. 옷을 벗은 똑같은 몸 하나만으로 욕탕이란 곳에서 심리적인 권력관계가 성립한다는 사실 말이다. 몸매 정도에 따라 우열이 가려지는 욕탕은 인간의 욕망이 끓어오르는 곳이다. 물론 남탕에선 성기의 크기가 좌우할 것이다. 자신의 몸이 아름답든 추하든, 우리는 내 몸이 나에게 어떻게 주어지는가를 탐색한다.
15살 되던 1월에 첫 생리를 했다. 여자는 때가 되면 생리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충격이 컸다.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 매며 진짜 여자가 되어 가는 내 몸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남녀의 구조적인 몸의 차이와 변화에 대한 관심도 생겼다. 거울 앞에서 손으로 웃옷을 바짝 조이면서 허리를 요리조리 보며 내 몸을 인식하는 능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푸코는 몸을 몸의 외부 어딘가에 따로 있는 자아나 실체로 간주되는 영혼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닌 생리적인 조직 그 자체로 봤다. 몸은 신비가 아니라 해석의 대상, 앎의 대상이 된다는 얘기다.
인도의 탄드라는 몸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종교다. 탄드라는 몸은 고통의 근원이 아니라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도구로 봤다. 몸이 갖고 있는 욕망이 오히려 해탈에 이르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남녀의 성교는 단순한 육체적인 결합이 아니라 우주와의 합일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탄드라의 이러한 경향은 성적인 문란을 초래했다. 몸으로 종교적 성찰의 심오한 경지에 이르려는 시도가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가를 보여준다.
일상적인 삶이든 지고(至高)의 삶이든, 결국 몸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과거에는 몸보다는 정신이, 감성보다는 이성이 강조돼 감정을 드러내는 걸 억제해야 했다. 이런 사실은 “자기 한 몸의 사사로운 욕망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라”는 공자의 말에서 증명된다. 특히 여자의 몸을 제한하는 관습은 오랫동안 이어져 왔지만 현대 들어서는 이런 경향이 희석되면서 남성의 시각적 대상물로 규정짓고 있다. 남자 또한 여자들에게 그 대상물이 돼가고 있다. 남녀가 눈물겹게 다이어트하고 근육을 키우는 지금의 현상에서 라캉의 통찰력이 엿보인다.
#삶의 인식은 인간의 몸을 통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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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싱싱한 몸에 치중한 사회적 담론에서 질병과 죽음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 김훈의 소설 ‘화장’은 영혼이나 정신이 아닌 ‘몸’에 천착한다.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병들고 시든 아내의 몸, 직장 신입사원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몸, 그리고 전립선염으로 소변이 잘 나오지 않는 50대 중반 주인공의 몸. 이 소설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몸이다. 서서히 생명의 불빛이 사위어가면서 한 줌의 재로 소멸하는 ‘火葬’과 육체의 생명력과 풍만함을 암시하는 젊은 여성의 ‘化粧’은 몸이 보여주는 죽음과 생명의 아이러니를 말한다.
니체는 “나는 전적으로 몸이며, 그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영혼은 몸에 대해 어떤 것을 일컫는 말에 불과하다”고 선언했다.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한 술 더떠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그의 정신을 온통 사로잡은 것은 인간의 고깃덩어리였다. 바야흐로 ‘몸’이 한 시대의 사회·문화적 관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인간의 삶이건 동식물의 삶이건, ‘몸’은 삶의 현상작용이다. 삶의 인식은 결국 인간의 몸을 통해 일어나는 것 같다.
에피소드 하나. 몇 년 전 남해를 갔을 때다. 찜질방에서 자고 아침에 비몽사몽으로 여탕에 들어간다고 한 것이 남탕 문을 열고 말았다. 처음엔 분간이 안돼 ‘어? 웬 아저씨들이 있지?’ 생각하며 몇초간 빤히 쳐다봤다. 마침 목욕을 끝내고 나와 옷을 입으면서 뜻하지 않은 여자의 방문에 그들 역시 날 뻥 하니 쳐다봤다. “옴마야!” 하마터면 여자 최초로 남탕을 엿본 치한으로 몰려 매스컴을 탈 뻔 했다. 욕탕 남자들이 옷을 입었으니까 망정이지….
우난순 교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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