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갑종 백석대 총장 |
성서(Bible)에 보면 어떤 유대인 학자가 예수에게 찾아와 질문을 던졌다.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이웃 곧 우리가 도움을 주고 사랑해야 할 대상은 제한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유대인들의 이웃관을 원(圓)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은 원 중심에 자기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중심에 있는 자신과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웃의 정도가 결정된다고 보았다. 자기 자신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자기의 가족으로 생각했고, 그 다음 자기 친척과 친구들이 위치하고 있다고 보았고, 그 다음에는 같은 신앙과 혈통을 가진 동족들이 있다고 보았으며, 그리고 원의 제일 가장자리에는 같은 혈통은 아니지만 유대교로 개종해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위치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예수 당대 유대인들은 이 원안에 들어있는 사람들만을 내가 사랑하고 도와줘야 할 나의 이웃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원의 범주 안에 들어올 수 없는 자들은 이웃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 이들과는 식사는 물론 대화까지 주저했다.
이와 같은 자기중심적인 이웃관을 가지고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한 유대인 학자에게 예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어떤 유대인 여행자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들을 만나 가진 것 다 빼앗기고 구타를 당해 길가에 던져졌다. 마침 그 길을 어떤 유대인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자를 보았지만 피하여 지나갔고, 그 뒤를 이어 레위인이 지나갔지만 그 역시 강도 만난 자를 보고도 피하여 지나갔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있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 길을 가다가 강도 만난 자를 보자마자 달려갔다. 가서 응급조치를 하고 그를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에 데려 갔다. 밤을 새워 그를 치료하고, 다음 날 떠나면서 여관 주인에게 여분의 비용까지 지불하면서 그가 일어날 때까지 돌보아줄 것을 부탁하였다.'
예수는 이야기를 마치고 유대인 학자에게 “당신 생각에는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졌느냐?”라고 반문하였다. 율법사는 질문의 중심에 자기 자신을 두는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하였지만, 예수는 오히려 강도 만난 자를 질문의 중심에 두었다. 말하자면 이웃, 우리가 도와주어야 할 사람은 나의 필요에 따라 내가 결정하는 어떤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 사람에 의해 내가 선택되어짐으로써 새롭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웃을 결정하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오히려 언제든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당사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전자의 경우를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돈다는 천동설에 비유할 수 있다고 한다면, 후자의 경우를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오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정부와 입법부, 여당과 야당, 사업주와 노동자 사이의 깊은 갈등의 골은 결국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자신의 이익과 편의를 중심으로 상대방을 이용하거나 대하려는 천동설 중심의 사고와 삶의 방식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정치인들이 진정 국민을 중심으로, 여당은 야당을 중심으로, 야당은 여당을 중심으로, 사업주는 노동자 중심으로, 노동자는 사업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한다면, 막혔던 소통이 살아나고, 깊어진 갈등의 골이 편편하게 메워지지 않을까?
최갑종 백석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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