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7년전 6월 강원도 여행을 할 때 강릉 경포호에서 본 점(占)을 잊지 못한다. 초여름의 싱그런 미풍을 맞으며 경포호길을 걷던 중 늙수그레한 점쟁이 할아버지를 만났다. 친구로 보이는 한 할아버지와 호숫가 공원에서 자리를 펴놓고 딸기를 먹는데 그 향이 어찌나 달콤한지 지나칠 수 없었다. 자연의 바람과 햇빛을 받고 자란, 모양은 볼품 없지만 진짜배기 딸기였다. “할아버지, 저도 그 딸기 먹고 싶어요.” “어어, 그래. 이리 와서 먹어.”
맛있는 딸기도 주시고 오랜만에 점도 볼까해서 봐달라고 했더니 점쟁이 할아버지가 손사래를 쳤다. “안봐도 돼. 그깟 딸기 먹었다고.” 계속 조르니까 봐 주셨는데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 했다. 초년에 많이 힘들었겠다, 그 고비 넘기느라 애썼다, 이젠 걱정 안해도 되겠다…. 점괘가 맞든 안 맞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여행지에서 듣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는 딸기의 달콤한 잔향과 함께 목이 메어 가슴이 뻐근해지는 감동을 받았다.
#첨단의 시대, 사람들은 점집에서 위안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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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집을 찾는 사람들은 그간 지탱해 온 힘든 삶과 앞으로도 견뎌내야 할 고달픔에 대해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위로를 받는다. 과학의 최첨단 시대에 주역이니 사주니 하는 얘기를 하면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신년들어 한해 운세가 궁금해 점을 보는 것은 흔한 풍경이다. 세상사 삶의 우여곡절에는 다 이유와 시기가 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좌절하고, 슬퍼하고, 쓰러지지만 죽고 싶을 만큼 고단한 삶에도 꿋꿋이 이겨내야 할 이유가 있다고 점은 강한 설득력을 발휘한다.
역술인은 말한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나를 버려야 나를 채울 수 있다고. 예수는 척박한 광야를 헤맸고, 고타마 싯타르타는 고행을 선택했다. 그런 고난 속에서 그들은 자기 자신을 버리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고난을 모르고 나이 오십을 넘겼다면 그것이 축복받은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난 주말 보문산 아래 점집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쁜 사주를 갖고 태어난다고 했다. 10명중 2명만 천복을 타고나고 8명은 사주가 좋지 않아 노력하고 절제해야 운명의 파고를 큰 일 없이 넘길 수 있다는 거다.
일종의 미신이라고 치부되는 주역은 5000년이 지난 고대의 학문이다. 하지만 주역이 유럽에 전파된 후 많은 지성인들이 주역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아인슈타인, 융, 헤르만 헤세 등은 주역에서 세상의 지혜를 찾고자 했다. 주역이론에 해박했던 융은 환자들의 꿈을 분석하면서 그 안에 있는 정신의 최고 유형이 괘상에 있음을 깨달았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도 신입사원 면접시 관상가를 대동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싸구려 삼류 잡지같은 인생도 희망은 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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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고대로부터 점을 쳐왔다. 점치는 행위는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인간은 왜 점을 치는 걸까? 미래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를 알아도 운명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는 운명에 관한 전형적인 예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아들 오이디푸스가 태어나자 신탁을 받았다.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범할 것이다.” 끔찍한 운명을 타고난 오이디푸스는 저주받은 운명을 피하려 했지만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 운명이 이긴 것이다.
역술인들은 이쯤에서 일갈한다. 그렇다고 노력도 안 하고 운명에만 맡기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큰 줄기의 타고난 운명은 바꿀 수 없지만 노력한 만큼 나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사계절이 순환하고 60의 갑자가 돌고 돌듯이, 내가 베풀면 나에게 덕이 되고 나쁜 맘을 갖고 살면 언젠가는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온다는 이치란다.
점을 보다가 문득 궁금했다. 점을 치는 역술인은 어떤 사주를 갖고 태어났을까. ‘소문난 철학관’의 방 선생(71)은 6살까지 땅에 묻으려고 하면 살아나고를 몇 번이나 치렀을 만큼 허약했단다. 청년시절 객지에 나가 돈벌이 하는 중에 자꾸 몸이 아파 점을 보니 신을 받으라고 하더란다. 보문산 아들바위 밑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다 산신령이 현몽해 어디어디 가서 주역을 배우라고 계시를 내렸다고 한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도 방 선생은 책을 보고 있다가 “나는 늘 공부를 해야한다”며 맞아주었다.
현대사회에서 점을 본다는 것은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점집을 찾는 사람들은 재판관의 문제해결 방식을 얻으려고 하는 게 아니다. 산을 넘고 사막을 건너는 인생의 긴 여정은 얼마나 고단한가. 알고 보면 우리네 삶은 싸구려 삼류 잡지의 통속성을 면할 수 없다. 사는 게 그런 거 아닌가. 누추하고 옹색한 점집의 노쇠한 점쟁이는 그렇게 내게 실낱같은 희망을 준다. 삼류는 삼류끼리 통하는 법이다.
/우난순 교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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