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사랑이 사랑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만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생명의 표현’에 의해서 당신 자신을 ‘사랑받는 자’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능한 사랑이고 불행이 아닐 수 없다.” 마르크스의 사랑에 대한 정의다. 사랑은 받기 위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라는 것이다. 즉,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소름끼치는 뱀파이어 소녀와의 사랑도 불사하는…
코끝을 알싸하게 하는 겨울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12월로 접어드는 어느 휴일에 영화 ‘렛미인’을 봤다. 사실, 사랑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았던 터인지라, 12살 소년과 뱀파이어 소녀의 사랑은 낯설었다. 낯섦은 곧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사랑이란 뭘까. 도대체 사랑의 본질은 무엇일까. ‘12살 소년, 영원한 사랑을 만나다’라는 카피가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 뱀파이어 영화는 사랑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고 속삭인다.
결손가정 아이로 학교에서 끔찍한 따돌림을 당하면서, 살인마의 환상에 빠지는 것으로 출구없는 삶을 사는 오스카르. 오스카르의 그런 삶의 틈새로 어느날 12살의 뱀파이어 소녀가 다가온다. 곁에서 자신을 돌봐주는 조력자를 시켜 사람을 죽이고 그 피로 연명하는 무시무시한 뱀파이어 소녀 엘리. 아름다운 풍광의 스웨덴 설원에서 오스카르와 엘리의 매혹적인 로맨스는 절박함에서 시작됐다. “내가 평범한 여자애가 아니어도 좋아해줄래?” 비참하고, 역겹고, 고독한 엘리의 이 말은 차라리 절규에 가깝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소름끼치는 뱀파이어 소녀와 왕따 소년의 우정과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 놀음’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현대인에게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 같다. 환멸과 공포로 옥죄는 현실 속에서 오스카르와 엘리에게는 서로밖에 없다. 그들에게 서로는 지옥을 벗어나는 구원의 길이란 걸 우리는 안다.
위대한 사랑이든 추한 사랑이든, 사랑은 인생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다. 사랑은 어려운 고난의 길과 같은 거다. 그래서 왜곡된 사랑은 위험하다. 열정이 지나치면,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자신 혹은 타인을 파괴한다. 히틀러는 가학성 음란증적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했다. 그는 자신한테 복종하는 자에게서 쾌감을 느꼈고, 그것에 의존했다. 수많은 인류와 자기자신을 파괴하는 그 사랑은 독거미처럼 위험하고 세계사에서 전무후무한 주인공이 됐다.
#조건없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다
억압과 폭력을 사랑이라 믿는 것은 어느 관계에서나 존재한다. 흔히 부모와 자식간에 성립되는 이같은 사랑은 양쪽 다 피폐해지기 마련이다.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는 모녀관계에서 비정상적인 종속과 지배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지배욕과 소유욕이 있는 여자는 진정한 어머니로서 성공할 수 없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자기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이 아마도 가장 어려운 사랑의 형태일 것이다.
주인공 에리카 코후트는 남편을 잃은 어머니에게 남편의 대리자여야 했으므로 어떤 남자와도 각별한 관계가 될 수 없었다. 어머니가 그것을 철저히 금했고 스스로가 어머니 이외의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종속될 수 없음을 자신이 알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과 지배는 결국 에리카에게 사디즘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학대하는 마조히즘적 성향을 길러주는 결과를 낳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성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천착한다. 이런 낭만적인 사랑은 성적 매력과 성적 결합에 의해서 생애 가장 유쾌하고 짜릿한 경험을 한다. “라면 먹고 갈래요?” 이영애가 유지태에게 한 이 대사만큼 이성에게 유혹적인 언사가 어디 있을까. 그러나 감정뿐인 사랑은 찰나적이다. 감정은 밀려왔다 사라져 버리는 것이니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는 이성애적 사랑의 영원불변성에 대한 소망 혹은 환상일 따름이다.
‘사랑이란 그 사람이 널 끝없이 괴롭게 만들어도 미워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응답하라 1988’은 성보라의 내레이션으로 정의한다. 나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오빠가 살아생전 가족들을 끝없이 괴롭게 한다는 이유로 오빠를 미워했다. 막 생명을 내려놓은, 온기가 사라진 오빠의 차디찬 발을 쓰다듬으며 자책하는 나는 사랑을 알지 못하는 미숙아다. ‘사랑의 기술’에 대해 유려하게 설파한 에리히 프롬은 그 자신도 사랑의 실천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고 고백했다. 나 또한 앞으로도 실천적 사랑은 자신이 없다.
우난순 지방교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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