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지구 전승비 |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은 7월 중순 금강에 도착했다. 제105전차사단으로 증강된 2개 사단(제3, 4사단) 규모였다.
미군 제24사단은 금강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7월 12일 금강교 주변 나루터를 수색해 나룻배를 모두 파괴하고 오후 9시 금강철교 일부를 폭파시켰다. 다음날 새벽 4시에는 24사단 공병 중대가 금강철교를 완전히 폭파시켰다.
7월 14일 북한군은 금강교를 우회해 공주 서쪽의 검상리 나루터에서 작은 배로 도하를 시작했다. 7일간의 대전지구 전투의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미군은 도하를 막고자 했지만, 북한 전투기의 공격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미군은 대전으로 후퇴했고 북한군이 공주를 점령하며 금강방어선은 무너지고 말았다.
금강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국군과 유엔군은 전국 교통의 요지인 대전을 사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강했다. 7월 15일 논산에 이어 18일 유성까지 점령했다. 조치원에 이어 공주, 논산, 유성을 거치면서 후퇴한 미군 제24사단 34연대는 또다시 갑천 방어선을 구축했다.
▲대전지구 전적비 |
제24사단은 7월 14일부터 시작된 대전지구 전투에서 7일을 버텨내며 20일까지 방어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참가자 3933명 중 전사 48명, 부상 228명, '윌리엄 에프 딘' 사단장을 비롯한 실종 874명 등 1150명이 희생됐다.
그럼에도, 대전지구 전투는 전략상 유엔군의 승리로 평가받고 있다.
7일간의 대전 방어가 없었다면 북한군의 주력부대를 막아낼 낙동강방어선 구축이 불가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벌어줬기에 북한군의 남진계획은 차질을 빚었고 낙동강 방어선 구축으로 인천상륙작전까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전 중구 보문산 공원 야외음악당 내에는 'UN'이라고 새겨진 대전지구 전승비와 전적비가 있다.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대전지구 전투를 이끈 미군 제24사단의 공훈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1975년 8월과 1981년 12월에 건립됐다.
세종=윤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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