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호 배재대 총장 |
기원전 431년 고대 그리스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난다. 이 전쟁은 외적으로는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이의 전쟁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델로스 동맹이라는 큰 두 축의 전쟁이다. 기원전 6세기 스파르타는 무력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통합하는 도시동맹을 구축하는데 이것이 바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이다. 그리고 기원전 490년 마라톤전쟁으로 불리는 제2차 페르시아전쟁이 일어난다. 이 전쟁에서 겨우 승리한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공격을 대비하여 이오니아, 아이올리스, 그리고 에게 해의 여러 폴리스를 주축으로 델로스 동맹을 맺는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결국 이 두 동맹 간의 전쟁이었고 스파르타가 중심이 된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승리한다.
고대 그리스의 동맹처럼 약육강식 혹은 적자생존의 국가에서는 필요하면 합치고 아니면 헤어지는 일은 늘 있었다. 중국의 전국시대에도 강한 군사력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동맹이 논의되었는데, 그 유명한 합종연횡이다. 기원전 4세기 진나라는 상앙이 변법을 실시하면서 강대국으로 성장하여 수도를 함양으로 옮기고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한다. 진나라의 세력 확장은 주변 국가에 긴장과 위협을 주기에 충분했다. 결국 진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군사력이 약한 연, 제, 초, 한, 위, 그리고 조나라 등 여섯 나라는 진으로부터 살아남을 방법을 찾는다. 이때 낙양 출신의 소진은 남북으로 종으로 있는 여섯 나라가 서로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자는 합종설을 주장하고, 위나라 사람 장의는 진나라 보다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동쪽에 있는 여섯 나라가 진나라에 의지하여 동맹을 맺자는 연횡설을 주장한다. 이후부터 우리는 이렇게 필요에 따라 대항하기 위해 힘을 합치거나 살아남기 위해 의지하는 것을 합종연횡이라고 한다.
지난 주 우리나라 민주화 개혁의 상징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며칠 동안 그 분의 많은 업적 중에 가장 많이 회자되었던 것은 화합과 통합이다. 조문객과 국장을 위한 장의위원만 봐도 당파와 정파는 물론 여야가 따로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 또한 김 전 대통령의 화합과 통합의 뜻을 잘 받아들여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평생 야당이었던 분이 여당과 손을 잡자 여러 가지 말이 나돌았다. 이때 김 전 대통령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과 함께 화합과 통합이라는 대전제 아래 합종연횡도 마다하지 않았다.
요즘 인기가 있어 너도나도 따라하는 프로그램 중에 버라이어티쇼가 있다. 이 버라이어티쇼를 보면 전쟁이나 국가 간에서나 있을 법한 동맹이나 합종연횡이 판을 친다. 그런데 그 이유를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방송국마다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한 끼 식사나 잠자리를 위해, 혹은 점수 몇 점을 얻자고 동맹을 깨기도 하고 합종연횡을 맺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남들은 평생 한 번 먹을지도 모르는 고급 한식이나 기름진 한우를 먹으면서 아주 사소한 양념이나 채소를 얻기 위해서 깰 때도 있고, 충분한 음식을 확보하고도 좀 더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얻기 위해 약속을 파기하기도 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프로그램인가? 온 가족이 함께 시청하는 프로그램에서 너무나 비열한 장면과 너무나 쉽게 파기하는 약속을 보면 버라이어티쇼가 추구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 맞다.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버라이어티쇼가 추구하는 것은 딱 하나라는 것을. 그것은 바로 “나만 아니면 돼!”이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도 충과 효를 먼저 생각하던 우리가 나만 아니면 된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앞에 다시 한 번 소리 높여 본다. 방송국에는 정말 미안하지만 제발 버라이어티쇼가 없어지기를. 아니면 최소한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만은 펴지 말기를 바란다. 그것도 아니면 비열과 비겁함으로 똘똘 뭉쳐 동맹이나 합종연횡이라는 약속을 너무 쉽게 파기하거나 깨는 것을 당신의 자녀가 보면서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김영호 배재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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