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대전형무소 망루 |
우물은 둘레 6.3m, 깊이 12m, 지름 2m에 불과했지만, 4곳의 우물에서 전대미문의 잔인한 방식으로 희생된 사람만 261명이다. 261명은 확인된 희생자지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우물 속에서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했는지 알 수 없다.
1950년 당시 발생했던 '대전형무소 학살사건'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정확히 83일째 되던 9월 15일 전세를 뒤바꾼 국제연합(UN)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됐다. 12일 후 서울 중앙청에 태극기가 게양됐고, 다음날 '9·28 서울 수복'(收復)을 선언했다.
하지만, 같은 시기 대전에서는 끔찍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허를 찔린 북한 전군에 퇴각명령이 떨어졌다. 대전을 점령하고 있었던 북한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인민교화소로 사용되던 대전형무소(현재 대전 중구 목동)에는 대전과 충남의 경찰과 교사 등 공직자와 우익청년단원과 지주 등 수천여명의 수감자가 있었다. 북한군 입장에서는 적(敵)과 같은 존재였지만, 전쟁 속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무고한 양민들도 많았다.
▲옛 대전형무소 우물 |
학살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형무소 일대에서 며칠간 계속됐다. 우물은 물론 형무소 뒷산과 골짜기 등 인근에서 학살은 멈추지 않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우물에 수장된 희생자를 포함해 당시 대전형무소에서는 모두 1559명이 희생됐다. 이 숫자는 시신 수습 작업을 진행한 충남도청이 집계한 수치다.
하지만, 보고서에는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5000여명이 희생됐고, 유일한 생존자인 이갑산 씨는 6831명이 죽었다'고 증언했다고 기록했다. 희생자들은 목동, 용두산 일대에 임시매장됐다가 현재 중구 사정동 사정공원 내 애국지사총에 잠들어 있다.
일제강점기 도산 안창호, 몽양 여운형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옥고를 치렀던 대전형무소는 1961년에 대전교도소로 개칭된 후 1984년에 유성구 대정동으로 이전했다.
대전형무소 터가 있는 곳은 중구 목동 대전출입국관리사무소 바로 옆은 아파트 단지로 바뀌고 높이 7.85m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인 망루(望樓)와 우물터 1곳만이 아픔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세종=윤희진 기자 heeji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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