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제주도와 한라산
쿵쾅쿵쾅… 후덜덜…. 심장은 미친듯이 뛰고 팔다리는 힘이 쭉 빠져 무릎이 금방 꺾일 것만 같다. 비행기에 타야 하는 시각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나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천하태평이다. 질겅질겅 껌도 씹어본다. 다시 집으로 갈까? 어느새 내 몸은 비행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좌석번호가 4D(死·Dead)인데다 옆자리 앉은 남녀가 영 수상쩍다. 일행인데 말 한마디 안하고 표정은 굳어있고 남자는 동남아사람 같기도 한데, 혹시 IS 대원? 비행기는 이미 몇천m 상공을 날고 있다. 부비트랩을 장착했는지 남자 배를 슬쩍 훔쳐봤다. 이 남자가 갑자기 나를 인질로 삼고 비행기 안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을 지 알게 뭐냐. 어느덧 시간은 30분이 흘렀다. 그런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 전처럼 불안하거나 식은 땀도 안 났고 옆의 남녀는 승무원이 준 커피를 홀짝이고 있다. 휴! 승무원이 불우아동돕기 성금 모금 주머니를 들고 지나갔다. 이따 다시 지나가면 기부해야지 하고 있는데, 얼래? 미스코리아 뺨치는 승무원이 뭐가 급한지 후딱 지나가 버리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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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제주도 여행은 나의 비행공포증을 극복하느냐 마느냐의 시험대였다. 그래서 한라산을 오르는 발걸음이 가뿐하고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간간이 비를 뿌려 대지는 촉촉했고 물기를 머금은 나무는 생명력이 충만했다. 한라산은 온대와 아한대 숲을 이루고 있어 수종이 다양하다. 아름드리 전나무와 조릿대, 굴거리, 매발톱, 주목 등이 무성하다. 거기다 화산암인 현무암은 시커먼 진흙을 뭉개놓은 듯해 밟으면 푹 들어갈 것만 같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꽤 많다. 성판악에서 오전 8시 30분에 출발해 백록담까지 4시간이 걸렸다. 화사한 등산복을 차려입은 여인들이 힘겹게 오르며 한마디씩 한다. “아이고, 한라산은 이게 마지막이겠네.”, “그러게 말야. 나이 더 먹으면 힘들어서 원.” 헉헉거리며 정상에 올라 막상 백록담을 마주했을 때는 감흥이 없었다. 김밥을 허겁지겁 먹고나자 발아래 제주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태곳적 거대한 용암을 내뿜으며 폭발하는 장면을 짐작만 할뿐, 고대하던 한라산에 올랐다는 뿌듯함이 앞섰다. 사실, 한라산을 얕봤다. 그런데 왕복 9시간이 걸렸다. 아무래도 이 '육짓것'이 제주도의 매력에 휘둘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제주도 사람들은 거칠고 억센 바위 위에서 생명을 이어왔다. 원시림과 300여개나 되는 오름 사이로 천지가 돌담과 귤나무 투성이다. 집도, 밭도, 묘지도 시커먼 돌덩이가 둘러싸고 황금색 귤나무가 숲을 이룬다. 이렇듯 육지와는 다른 특이한 풍광만큼이나 제주도는 신화와 전설이 풍부하다. 고씨, 양씨, 부씨라는 3개의 성씨가 탐라국 건국신화에 등장하고 1만8000 신들의 내력을 담은 '천지왕본풀이'라는 천지개벽 신화도 존재한다. 8년전 제주도로 이사왔다는 김 할머니의 얘기도 이에 한몫 한다. “여기는 미신이 많아. 이사가는 시기도 따로 있어. 여기 사람들 말이 그때가 신들이 하늘로 올라가 회의 중이어서 그 시기에 이사해야 한다는 거야. 다른 땐 집 매물도 안나와.”
여행지에서의 우연한 인연은 여행의 기쁨을 배가시킨다. 중문 5일장에서 만난 노송성·이영옥씨 부부는 잊지 못할 감동을 줬다. 여행가면 으레 재래시장을 둘러본다. 거기야말로 생생한 삶의 현장 아닌가. 중문시장에서 갓 잡은 은갈치, 아지, 옥돔을 입을 딱 벌리고 구경하는 내가 재밌는지 집으로 초대하겠단다. 알고보니 대전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분들이었다. 뜻밖에 점심으로 은갈치조림을 배불리 먹는 호사를 누렸다. 몇 년전 은퇴해 중문에 집을 마련해 종종 휴양차 들른다는 이 부부의 그림같은 '별장'은 고개를 들면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노송성씨는 항공사 CEO까지 지냈지만 골프도 안하고 일만하며 우직하게 살아왔다고 한다. 부인 이영옥씨에게 고운 자태가 고생 한번 안하셨을 것 같다고 하자 정색을 하며 손사래친다. “아이고 그런 말 말아요. 나도 마냥 편하게 산 거 아니에요. 시부모 병간호도 오랫동안 했어요.”
여행내내 비가 오다 그치다 해서 몸이 묵지근했다. 버스 타고 걷고 또 걷는 가운데 무거운 배낭까지 어깨를 짓눌러 몸이 천근만근이다. 산방산 탄산온천에서 온천수로 반신욕도 했지만 여독이 쌓여 마지막 날은 제주시에서 느긋하게 어슬렁거렸다. 극장 가서 영화 '내부자들'도 보고 거리도 걸었다. 『료마가 간다』의 시바 료타로는 젊은 시절 제주도를 꼭 와보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고통과 고독 속에서 '세한도'라는 걸작을 탄생시킨 김정희의 유형의 땅 제주도. 제주도는 이제 더 이상 변방의 유배지가 아니다. 모든 이가 꿈꾸는 낙원이었다. 아! 다음 휴가는 이병헌이랑 '모히또 가서 몰디브 한잔 할까?'
▲가는길=항공편은 청주에서 50분이면 간다. 저가 항공도 많아 이용하면 저렴하게 갈수 있다. 배편은 목포, 장흥, 진도, 완도, 부산, 여수, 인천이 있다.
▲먹거리=이왕이면 제주 향토요리를 먹어보는 게 어떨까. 고기국수, 몸국, 성게 미역국, 오분작 뚝배기, 갈치국, 흑돼지 등. 갈치국은 비린내가 전혀 안난다.
글·사진=우난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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