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이어서인지 시장 먹자골목은 활기가 넘쳤다. 식당마다 손님들이 꽉찬 곳도 있고 한 두명밖에 없는 곳도 있다. 뭘 먹을까, 어슬렁거리며 두리번거리자 닭내장탕집 주인이 나와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내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쌩하니 들어가버린다. 짬뽕집이 유난히 식객들이 북적거려 구미가 당겼다. 자고로 어느 식당이 맛있는지 모를 경우 무조건 사람들이 많은 곳을 들어가라 했다. 한 무리의 아저씨들,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 중년의 여자들. 메뉴는 냉면, 짜장면, 짬봉이었다. 그런데 날씨탓인지 하나같이 짬뽕그릇에 얼굴을 박고 후루룩 쩝쩝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는다.
없는 게 없는 보물창고 같은 재래시장
“여기 짬뽕 하나 주세요.” 냉면 그릇에 홍합이 산처럼 쌓이고 그 밑에 빨간 국물과 소담하게 담긴 면을 보자 침이 샘처럼 고인다. 정신없이 홍합을 까먹고 얼큰한 국물이 식도로 내려가자 ‘그래, 이 맛이야’가 절로 나온다. 할아버지 두분이 지팡이를 짚고 뛰뚱거리며 자리에 앉자 주인 할머니가 반갑게 맞으며 한마디 한다. “에구, 이런 비오는 날은 집에 있지 뭐하러 나오신댜.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쩔려구.” 보아하니 오래된 단골이신가 보다. 밑반찬을 갖다 놓는 주인 할머니의 마디가 굵고 두툼한 손에서 땀흘려 일하는 노동의 신성함이 느껴진다.
거개의 시장이 그렇듯 중앙시장도 없는 게 없다. 보신탕집, 어물전, 떡집, 이불집, 시계점, 금은방, 구제옷집 등 의식주에 필요한 가게들이 망라돼 있다. 어릴 적, 식구들이 없는 틈을 타 안방 벽장에 들어가 이것저것 뒤져보곤 했다. 거기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다 있다. 구부러지고 녹슨 못, 나사, 단추, 나일론 끈, 실톱, 망치, 낡은 편지봉투, 안티프라민, 옥도정끼…. 보물창고와 다름없었다. 비밀스런 신화나 전설이 담긴 상자를 열어보는 듯한, 가슴 두근거리는 의식을 치르는 순간이었다. 유년시절의 경험때문인지 시장 구경하는 재미가 지금도 특별하다.
비오는 늦가을 오후 두분 차 마시는 분위기가 근사하다고 띄워드렸다. “시골 함석집 비오는 소리 들어봤소? 아! 함석집 비오는 소리 들으며 마누라랑 섹스하면 참 운치 있을 텐데.” 백봉기씨의 엉뚱하고 도발적인 발언에 모두 까르르 껄껄 한바탕 웃었다. 계란노른자 동동 띄운 쌍화차 맛이 진하고 구수했다.
고통도 추억으로 저장하는 마법같은 곳
어느덧 다섯 시가 훌쩍 넘어 어둠이 찾아들고 있었다. 비가 와서 손님이 없다고 상인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뿌연 김이 펄펄 나는 순대노점 아주머니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맛있는 순대 먹어보라고 손을 까불렀다. 며칠 전 늦은 밤 잠들기 전 배가 많이 고팠는데 불현듯 순대 생각이 간절했다. 갑자기 하고많은 것 중에 순대가 떠올랐을까. 대학 2학년 때 큰언니따라 중앙시장에서 순대를 먹은 적이 있다. 그땐 지금처럼 지붕도 없고 한 데서 쪼그리고 앉아 먹는 곳이었다. 지옥같은 성장통으로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는 내게 언니는 암말 없이 소금 찍은 순대를 먹으라고 건넸었다. 그땐 무슨 맛인지도 못느끼며 우물우물 씹다 간신히 넘기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 그 자리에 와서 순대를 같이 먹을 그 언니가 없다. 만시지탄이다. 살아 있을 때, 곁에 있을 때 좀더 잘할 걸. 누구나 하는 후회가 나도 뼛속 깊이 스며든다. 내 청춘의 고통스런 추억이, 어느날 훌쩍 떠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나를 이곳으로 소환한 건 아닐까. 옛 추억을 호명하는 건 위안이 되기도 하고 때론 고통이 되기도 한다. 허나 그 고통이 나를 단단하게 성장시키기도 한다. 시장을 찾는 이유다.
우난순 지방교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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