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낙훈 산흥초 교감 |
유대인들은 아이가 학교에 다녀오면 제일 먼저 물어보는 것이 '오늘은 선생님께 무슨 질문을 했니?'란다. 그렇다. 교육은 질문 즉 궁금증,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떠한가? 묻지도 않았는데 주위에서는 자꾸 가르치려 한다. 더욱 재미있는 건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아이들은 뱉어내고 있으니 넌센스도 이런 넌센스가 또 있을까. 이렇듯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 배움에는 부작용이 심하다. 우리가 억지로 외면한다해도 '사회의 필요Needs'에 의한 가르침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 바야흐로, '개인의 원함Wants'에 의한 배움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가르치는 교사와 학부모는 인정해야 한다.
스스로 좋아서 하는 '배움'에는 기본적으로 즐거움을 내포한다. 문명사회의 턱 높은 계단에서 풀리지 않는 지적호기심에 밤새 고민하다 누군가의 힌트 한마디에 '아-하, 그렇구나'의 환희를 느낄 수 있어야 진정한 '학자學者'가 아닐까? 고민하는 자도 학자요, 깨우치는 자도 학자다. 자발성이 결여된 배움이 오늘날 OECD 회원국 중 가장 불행하다고 느끼는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우리 교육계에 '빨리 감기' 버튼이 아닌 '잠시 멈춤' 버튼이 필요한 시점이다. 진정 배움을 위한 활동인지 냉철히 성찰해야 한다. '남'을 인식하지 말고 오로지 '나의 내면'만을 생각하자. '남'을 인식할 때 그것은 성찰이 아닌 평가의 굴레 속에 거짓된 삶을 살게 된다. 거추장스러운 껍데기를 벗어야 진정 나비가 된다는 얘기다.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숲 속 작은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한지 어느새 2년째다. 이 곳 아이들에게는 아기자기한 자연 환경과 자신만의 악기(樂器)는 더없는 친구이자 선생님이다. '학력신장'이니 '인성교육'이니 하는 그럴듯한 이름의 프로그램 하나 없이도 순수한 영혼들의 배움에는 쉼이 없다. 종일 풀벌레와 이야기하고, 친구들과 관악 하모니를 이뤄가며 자신의 내면을 완성해 간다. 변변찮은 놀잇감 하나 없었어도 자연 속에서 누구의 간섭 없이 풀피리 불며 자연과 하나 되어 행복해 했던 우리네 학부모들 어린 시절처럼. 정중동(靜中動) 속에 절로 끄덕여지는 공감(共感)만 있을 뿐이다.
소규모학교 통폐합이니 뭐니 바깥 세상은 여전히 시끄러워도 역시 학교는 슬림(Slim)화 돼야 한다. 단언컨대, 작은 학교에서 버려지는 알맹이는 하나 없다. 잘난 알맹이건 못난 알맹이건 저마다의 소중한 꽃을 피우니 어느 것이 더 예쁘다고 말하는 것도 우습다. 각자의 빛깔이 있고 그 빛깔들이 어우러져 멋진 숲을 이루니 그걸로 충분하다.
우리 학교 아이들 노는 것 하나만큼은 누구에 버금간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 속에서 놀잇감을 찾아다니니 이 또한 잘만 엮어보면 훌륭한 창의성교육 사례가 될게다. 뭐가 그리 신기한지 작은 곤충 들여다 보며 여기 저기 뛰어다니다 어느 선생님이라도 보이면 호기심 가득 담은 표정으로 달려와 이것저것 묻기에 바쁘다. 그렇게 알게 된 내용은 동생들에게 전수가 아닌 전이된다. 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이는 따로 없다. 그저 모두가 배우고 모두가 감동할 뿐.
성낙훈 산흥초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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