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대부' |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았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The Godfather)’를 보지 않겠냐고. CGV에서 ‘스크린 문학전’이란 타이틀로 작품성 있는 영화를 11월 8일까지 9일간 상영 중이다. 그런데 난감했다. ‘대부’ 상영이 하필 출근하는 날인 지난 일요일 딱 하루였다. 꼭 보고야 말겠다는 집념에 일하는 중간에 틈을 내 끝까지는 못보더라도 극장에 가는 게 우선이었다. 출근하자마자 편집부에 피치못할 일이 생겨서 나갔다 와야 하니까 낮판을 4시 전까지 교열보게 해달라고 구라를 쳐버렸다.
내가 ‘대부’를 처음 본 건 고등학교 2학년 1983년이 막 저물어갈 때로, 겨울방학을 앞두고 친구랑 선생님의 눈을 피해 허름한 극장에서 추위와 긴장으로 덜덜 떨며 본 영화다. 그때의 충격과 강열함은 내 영화사의 한 획을 긋는, 그야말로 내 인생의 영화로 자리매김했다. 그 뒤로 TV로, 비디오방에서, VCR로 열 번도 넘게 봤으니 대사를 줄줄 꿰는 수준이 됐다.
#‘대부’는 나를 무장해제시키는 마력이 있는 영화
▲ 영화 '대부' |
그런데 이번 ‘대부’를 보러 가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나를 비롯해 남녀노소 혼자 온 사람이 반을 넘는 거다. 머리가 히끗히끗한 은발의 노신사, 바바리 코트를 입은 중년의 남자, 팝콘을 들고 온 20대의 젊은이. 32년 전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를 다시 또 극장에서 마주한 설렘을 옆에 앉은 노신사도 느낄 것 같은 동지애가 전해졌다. 어둠이 깔린 극장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익명성이 요구되지만 같이 호흡하며 각자의 추억과 영화에 대한 열망을 나누는 우리는 그 순간만큼은 연인이고 친구가 된다. 영화감독 프랑소아 트뤼포는 “고립과 소외에 시달리며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영화관의 어둠이 서로를 인식하고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했다”고 말했다.
‘대부’가 우리에게 주는 매혹은 어떤 새로운 경지의 깨달음이 아니라, 온전히 영화만이 선사해줄 수 있는 감흥에 대한 그리움과 기대가 있다. 영화에 대한 비판과 분석은 애초에 허락되지 않는, 나를 무장해제시키는 마력이 지배한다는 얘기다. 콜레오네가의 사람이 아니면 모두가 적인 그들의 세상에서, 비토 콜레오네가 패밀리를 업신여기는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의 60만 달러짜리 애마의 목을 따는 잔인함도 갱영화의 스타일리시한 디테일이라고 상찬받아 마땅하다.
영화와 더불어 성장한 나는 ‘주말의 명화’ 세대다. 주말의 명화 시그널 뮤직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공주에서 자취하며 고등학교를 다닐 때 주말의 명화를 보기위해 거의 매주 집에 오곤 했다. 공부는 뒷전인 채 밤 늦게까지 눈치주는 아버지와 신경전을 벌이며 영화에 집착했다. 거의 고물에 가까운 TV 앞에서 오도마니 웅크리고 앉아 ‘제인 에어’, ‘젊은이의 양지’, ‘에덴의 동쪽’을 보고 학교가서 친구와 영화얘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는 시절이었다. 고백하자면 고 3 수험생때도 공부 한번 해본적 없고 오직 머릿속엔 영화 생각밖에 없는 철없는 할리우드 키드였다.
#영화관 관람은 아직도 포기할 수 없는 매혹적인 행위
영화광들이 작품이나 작가, 배우에게만 관심을 갖는 건 아니다. 그들이 영화에 매혹을 느끼는 대상은 매우 넓다. 영화를 보았던 계절, 영화가 상영된 장소 등의 기억들은 추억을 호명한다. 대학 2학년 봄 축제때 학교에서 본 영화를 잊을 수 없다. 영화 동아리가 주최한 영화제에서 본 ‘암흑가의 두 사람’은 내 감정선을 마구 자극해 울음보를 터트리게 하고 말았다. 교수형 당하기 직전 알랭 들롱의 공포와 분노에 찬 파란 눈이 클로즈업될 때 난 감정이 격해 흐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영화가 끝난 후 주위사람들은 아랑곳 않고 엉엉 울어서 친구를 당황케 한 경험이 있다. 내 억압된 분노가 억울하게 교수형 당하는 알랭 들롱에게 감정이입된 것은 아니었을까.
현대인에게 영화는 하나의 중요한 오락거리다. 기술의 발달로 이젠 휴대폰으로도 영화를 보는 게 일상화됐지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이다. 그런 이유로 TV가, 휴대폰이 끊임없이 영화를 보여주지만 그 매혹성은 영화관을 따라가지 못한다. 영화비평가 앙드레 바쟁이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 꿈을 꾸는 상태와 비슷하다며, 영화가 태생적인 에로시티즘과 일정한 관계를 맺는다고 단언한 이유다.
‘대부’는 내게 처음으로 남자들의 세계에 대한 로망을 갖게 해준 영화다. 감미롭고 애절한 테마곡 ‘Speak Softly Love’가 흐르는, 웅장하고 비장한 누아르영화의 전형을 보여준 ‘대부’는 그래서 여전히 정당성을 부여할 수밖에 없다. 맹목적이고 이기적인 가족주의의 허상이라는 비판은 아무래도 좋다. 이 영화를 처음 본 지 30여년이 흘러 50대가 된 지금, ‘대부’는 가치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감흥의 기본명제임을 깨달았다.
우난순 지방교열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