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선해 대전내동초 교감 |
특히 푼크툼은 사진을 보는 관객이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주관적으로 작품을 받아들이는 요소가 된다. 보는 이에 따라 같은 상황의 재현에 대하여 푼크툼은 그 독특한 주관성으로 인하여 일반적인 공유와는 다른 별개의 해석을 양산한다.
일반적으로 학교 내부의 모습은 내외적인 방해 요소를 차단하기 위해 교실 문을 닫은 높은 창문과 벽이 늘어선 긴 복도가 그려진다. 이렇듯 그저 프레임의 틀에 박힌 스투디움으로 재현되는 학교의 획일적인 복도를 걷다보면 순간 폐쇄된 불통(不通)의 푼크툼이 파고 들어와 날카로운 상처를 남긴다.
나름 치유의 노력으로 회복되더라도 상흔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계속적으로 발생하는 상처로 얼룩지고 있는 두꺼운 벽과 굳게 닫힌 창으로 폐쇄되어 질식할 것 같은 학교 현장을 어떻게 환기시킬 것인가? 요즈음 학교의 현실은 종종 교육 주체자인 학생과 교사, 학부모 간에 문을 열기 위한 소통을 시도하지만 여는 것조차 그리 녹록하지 않다.
이와 같은 학교에서의 불통 현상은 각종 사안으로 교육 주체자간 소통의 부재가 심화되어 반목과 무신뢰로 엉킨 실타래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버뮤다 삼각지대의 혼돈에 빠져 제대로 헤쳐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목격되는 것이다. 누구 탓이라고만 할 것인가? 무신불위(無信不立), 교육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그 어떤 가치도 실현될 수 없다. 헬렌 켈러는 '믿음은 산산조각 난 세상을 빛으로 나오게 하는 힘이다'라고 장애의 삶을 극복하는 원동력을 굳은 신뢰에서 찾았다.
이기적인 사고에서 파생되는 교육의 분열은 공동체간의 신뢰 회복을 위한 소통만이 해결이다. 그렇다고 단명(短命)한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 알렉산더처럼 고르디안의 매듭을 단칼로 베는 즉결적인 소통은 장기적인 희망이 되지 않는다. 백년대계의 교육은 단기적인 결단으로 훼손하지 않고 소통의 실마리를 찾아서 풀어나가는 끈기와 인내를 통해 실현해야 한다. 플라톤의 완벽한 정삼각형을 찾는 추상적인 교실 이데아를 꿈꾸는 환상이 아닌 시나브로 트라이앵글의 명량한 울림을 지향하는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트라이앵글은 스스로 소리를 내는 악기가 아니다. 같은 재질의 금속으로 만든 비터(beater)로 두드리면서 소리가 난다. 이처럼 교육 현장에서의 소통은 트라이앵글의 울림을 전제로 한다. 교육은 마음과 마음이 맞대고, 얼굴과 얼굴이 맞대어 좋은 울림을 내어야 한다. 이러한 긍정적 대면관계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바탕으로 하는 소통이 절대적인 요소다. 미국의 구급차는 'ambulance'란 말을 차의 옆면에는 제대로 써 놓았지만 앞 범퍼에는 뒤집어 적어 놓는다. 앞선 차량은 뒤의 사물을 좌우 반대로 인식하는 백미러를 통해 신속하게 구급차를 파악한다. 이는 앞선 차량에 대한 배려가 담긴 철학적 사고의 발상이다.
이처럼 상대를 배려한 소통이란 역지사지로 화자가 아닌 청자 중심을 기본으로 자신의 처지와 관점만을 고수하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며 어우러져 통하게 하는 것이다. 교육자는 기술이 아닌 철학적 사고를 지녀야 한다. 맹목적인 스킬로서의 지도 방법에서 벗어나 진정성을 갖고 따뜻한 이해와 공감으로 소통해야 한다. 교육의 중심, 가온누리는 학생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학생을 중심으로 학부모와 교사는 상호간의 무한 신뢰와 막힘이 없는 소통으로 교육적 공감대를 만들어 최상의 트라이앵글 울림을 만들어야 한다.
서늘한 가을날, 굳게 닫힌 교실 문을 열어 탁한 실내를 환기하듯이 교육공동체 모두가 서로 마음을 열고 소통하여 다함께 행복한 교육이 실현되는 따뜻한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박선해 대전내동초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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