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개성시 만월대 인근의 집에서 15살에 한국전쟁을 맞이한 최씨는 그해 겨울 전쟁을 피해 서울 외삼촌 집으로 걸어서 피란을 떠났다. 한겨울의 추위를 이겨내며 서울에 도착했지만, 곧바로 1·4후퇴를 맞아 다시 피란 짐을 싸야 했고, 곧 중공군에 포위돼 더는 남하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방향을 돌려 이틀 밤낮을 걸어 집이 있던 개성까지 도착했으나 도시는 폭격에 폐허로 변했고 최씨의 집도 대문이 걸어 잠긴 채 가족들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최씨는 아무도 없는 집 마당에 앉아 엉엉 울고 있을 때 방공호에 피신했던 어머니와 감격스레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전쟁 와중에 아들과 어머니의 재회는 최씨가 전쟁을 피해 다시 경기 강화도로 피란을 떠나면서 기약없는 이별을 했다.
7남매 중 6형제는 전쟁을 피하거나 일자리를 찾고자 또는 방위병에 차출돼 남한에 정착하게 됐고, 이북에는 막내 여동생과 부모만 남게 됐다. 최씨는 전쟁이 끝나면 부모를 다시 만날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남북 분단은 이들 가족에게 생이별이 됐다. 논산시 강경읍에 정착한 6형제 중 지금은 최씨 혼자 생존했고, 북한에 부모까지 돌아가신 상태서 헤어질 때 8살이던 여동생과 조카(47)를 만나게 된다.
최씨는 “얼마 전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는데 집 주소를 묻는 의사 질문에 무의식중에도 개성집 주소를 댔다”며 “북에 여동생이 살아 있어 만날 수 있다는 소식에 가족들 보는 앞에서 엉엉 울음을 터트렸고 부모님 기일이나 장지 등 물어볼 것을 그때그때 노트에 기록하고 있다”고 밝혔다.
충남에서 또다른 이산가족 상봉자로 선정된 김병국(78·천안) 목사는 상대적으로 담담하게 대상자 선정 소식을 접했다.
북한의 회신에 따르면 형님 세 명(김동찬·병렬·병욱)은 모두 돌아가셨고, 조카 김효은과 김진환을 만나게 된다.
1989년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했고 그동안 공식적으로 세 차례 북한에 다녀오면서 한국전쟁 때 헤어진 형제 소식을 수소문했을 정도로 헤어진 가족을 만나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있다. 김 목사의 아버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항일독립투사 월강(月岡) 김관제 선생이고, 한국전쟁 직후 김씨의 형 세 명은 북한군에 입대했다.
김 목사는 “조카를 만나 형제들이 북에서 어떻게 지내셨는지, 돌아가셨다면 묘지는 어디인지 가보고 싶다”며 “멀리 아프리카에 살아도 서로 연락하며 지내는 시대에 혈육을 이렇게 분단시키고 연락도 못 하게 하는 시대가 정말 야속하다”고 설명했다.
한편, 오는 24일부터 26일까지 금강산에서 우리측 방북단 90명(대전 2명, 충남 6명, 충북 7명)이 북측에서 생존 확인된 재북가족을 만난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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