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의 식민불교정책에 항거해 한국 전통불교 고수 투쟁을 선언한 1941년 선학원 고승대회 기념사진(앞 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만공 대선사) <수덕사 제공> |
▲만공 대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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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은 일제침략시대 총독을 꾸짖으며 항일정신을 드높인 인물로 평가되며, 만해 한용운에게는 독립자금도 전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불교계 등 후손들은 일본의 부당함에 항거한 비무장 정신적 독립운동의 최고봉으로 만공의 행적을 꼽는다.
1937년 3월11일, 악질로 유명한 일제 미나미 총독은 전국 13개 도지사와 불교 31본산 주지가 모인 가운데 조선불교진흥책을 주제로 한 회의를 열었다.
미나미는 이 자리에서 야비한 눈을 치켜뜨고는 “조선불교는 일본불교와 합병해 더 큰 진흥을 이뤄야 한다”고 주지들을 압박했다.
총칼을 옆구리에 찬 일본인들 앞에서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던 순간, 당시 마곡사 주지였던 만공은 책상을 두 손으로 힘껏 내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미나미를 한 손으로 가리키며 사자같이 호통 쳤다.
“조선불교는 1500년 역사를 유지하고 그 수행정법과 교화의 방편이 여법하거늘 일본불교와 합하여 잘 될 필요가 없으며, 일제가 종교에 간섭하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진흥책이다.”
이에 더해 만공은 “데라우치 전 총독은 조선 승려들을 파계시킨 죄인으로, 죽어서 무간지옥에 떨어져 고통 받을 것”이라고 꾸짖었다.
총독과 헌병대를 비롯한 일본인들의 사기를 꺾고, 조선인의 자존을 지켜낸 만공의 이날 드높았던 위상은 이후에도 일제가 한국불교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정신적 충격으로 작용했다.
1940년 10월1일 발간한 조선총독부시정 30년사에서 일본은 “조선불교의 진흥에 관해서는 시정 이래 시종일관 보호 선도에 힘쓰고 있는 중이지만, 기대한 만큼 효과를 올리지 못했다”며 조선불교말살정책의 실패를 인정했다.
만공은 만해 한용운에게 독립자금도 지원했다. 당시 만공을 모셨던 수연스님(90)은 “총독부 회의와 선학원 고승대회 등에서 만공이 만해에게 독립자금이 든 봉투를 건넸다”고 전했다.
전 수덕사 주지인 옹산 스님은 “총칼로 싸우지는 않았지만, 총칼을 찬 적장인 일제 총독과 헌병대 앞에서 목숨을 담보로 정신적 굴복을 시켰다면, 만공 선사의 행적은 무장투쟁 못지않은 중요한 항일운동”이라고 설명했다.
만공은 1871년 태안에서 태어나 1883년 공주 동학사에서 출가했다.
1941년에는 일본의 식민불교정책에 항거하기 위해 선학원 고승대회를 주도하는 등 일제에 대항했으며, 광복 직후인 1946년 생을 마감했다.
내포=유희성 기자 jdy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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