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태 한남대 총장 |
여름철의 수고를 정리해 열매(과일)를 거두는 절기다.
등화가친(燈火可親)이나 형설지공(螢雪之功)은 모두 가을철의 독서와 학문정진을 격려하는 말들이다.
시조 시인 장희구(張喜久) 박사의 번안시조 소개를 통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9~1546)이 쓴 '讀書'라는 시를 감상하면서 그 당시 철학자의 독서론을 회고하고자 한다. 조선 최고의 시인을 꼽으라면 단연 황진이를 앞줄에 놓는다. 어느 남자도 황진이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고, 어느 시인도 황진이의 시 재주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러나 반대로 황진이는 서경덕을 학문적 스승으로 사모했던 인물이다. 그래서 서경덕과 황진이와 박연폭포를 '송도삼절'이라 부른다. 그러나 서경덕은 독실한 철학자였고 시인이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을 달게 받으면서도 결단코 부귀와는 손잡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그의 시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①“독서당일지경륜/세모환감안씨빈/부귀유쟁난하수/임천무금가안신”(讀書當日志經綸/歲暮還甘顔氏貧/富貴有爭難下手/林泉無禁可安身) “글을 읽을 때 큰 뜻을 품으니/가난의 쓰라림도 달게 받겠네/부귀 공명에 어찌 손을 댈 건가/다만 산과 물에 포근히 안겨야지”
서경덕은 18세에 '大學'을 읽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에 이르자 “학문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지 않는다면 글을 읽는다 한들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생각해 독서보다 格物이 우선임을 깨닫게 되자, 침식을 잊을 정도로 그 연구에 몰두하였다. 소세양이 황진이와 시문을 주고받으며 한 달간 계약결혼을 했던 것에 반하여 서경덕에게는 황진이가 그의 학문에 탄복하여 여인의 자존심까지 굽혀가며 구애했지만 끝내 거절했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②“채산조수감충복/영월음풍족창신/학도불의지쾌활/면교허작백년인”(採山釣水堪充腹/詠月吟風足暢神/學到疑知快闊/免敎虛作百年人) “나물 캐고 고기를 낚으며 그런대로 살면서/달을 읊고 바람을 쐬며 정신을 씻어보네/내 학문의 이치를 깨달아 즐겁기만 하니/어찌 이런 인생을 헛되다 하겠는가?” 요즘 세상 논리로 보면 너무나 고매하고 탈세속적이지만 조선 시대 학자들은 이렇게 청빈하고 무흠하며 송죽 같은 지조와 절개로 자기 존재감을 즐겼다. 돈이 소중하지만 돈보다 더 귀중한 것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서경덕은 권세와 재물을 멀리하고 안빈낙도(安貧道)를 기본가치로 삼아 만물의 근원과 운동변화를 기(氣)로써 설명했고 그 기를 능동적이고 불멸하는 실체로 보았던 것이다.
③백운거사 이규보(白雲居士 李奎報·1168~1241)는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문인이다. 32세 때부터 벼슬길에 올랐고, 국가 공동체를 큰 나무(大樹)로 비유하여 국가가 주는 여러 가지의 혜택에 감사하는 시를 남겼다. “호시염천게/의어급우차/청음일산허/위황역운다”(好是炎天憩/宜於急雨遮/淸陰一傘許/爲?亦云多) “더운 날씨에 쉬기 좋고/소낙비 올 때 피하기도 좋구나/시원한 그늘이 양산만 하니/누리는 혜택이 이렇게 많구나” 그의 대수예찬(大樹禮讚)은 국란의 와중에도 국가와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감사하며 살기를 바라는 국민으로서의 바람직한 태도와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④끝으로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1875~1965)이 고국을 그리면서 쓴 시도 찾아보자. “일신범범수천간/만리태양기왕환/도처심상형승지/몽혼장재한남산”(一身泛泛水天間/萬里太洋幾往還/到處尋常形勝地/夢魂長在漢南山) “물 따라 하늘 따라 떠도는 이 몸/만 리 태평양을 몇 번이나 오갔던가/가는 곳마다 명승지를 방문할 수 있었지만/꿈에서라도 한강과 남산을 잊을 수가 없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우며 나라 잃은 설움으로 이곳저곳 다니며 풍찬노숙했지만, 꿈속에서도 고국의 산천인 한강과 남산을 잊지 못해 하고 있다. 국권을 잃었을 때 김구는 중국에서, 이승만은 미국에서, 이회영과 신채호는 만주에서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수고했으니 우리들도 애국지사들의 희생을 잊지 말고 나라 사랑과 겨레 사랑에 한층 더 정진해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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