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두서 자화상 (尹斗緖 自畵像]) |
문화계에서 미니멀리즘이 대중에게 어필하듯 그 시대의 다른 초상들보다 단순한 이 ‘자화상’은 그래서 호소력이 있다. 한올한올 생생하게 묘사된 낚싯줄 같은 풍성한 수염과 살짝 올라간 눈꼬리와 적당한 살집의 얼굴은 기골이 장대한 장수같은 인상을 준다. 거기다 강열한 눈은 이 그림의 압권으로 그림의 주인공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아름답고 기품있는 초상화가 어딨겠나.
7년 전 늦가을, 경주 석굴암 본존불을 마주했을 때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 ‘아름답구나!’였다. 하나의 대상을 바라보는 느낌은 같은 걸까. 옆에 있던 나이 지긋한 어른들 중의 한 분이 “참 아름답고 잘생기셨네”라며 감탄했다. 그 불상을 만지면 살아 있는 듯 맥박이 뛸 것 같고 온기가 나에게 전해질 것 같았다. 붉은 기가 도는 섬세한 입술은 금방 무슨 말이라도 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서늘한 미남자를 보는 느낌이었다.
#화가들의 자화상은 내면적 복합성 깃들어 있어
▲ 렘브란트의 시대별 자화상. |
조선시대는 자화상 자체가 금기시된 사회였다고 한다. 렘브란트가 자화상을 반복적으로 그렸던 서양의 화단과 다른 현상이다. 하지만 윤두서의 자화상은 인생에 대한 우수와 내적 성찰, 시대에 대한 반항의 그림자가 내포돼 있다.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로 막대한 부와 윤선도가 남긴 정치.사회적 유업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시대적 상황으로 출세에 대한 좌절과 가족들의 죽음으로 그의 삶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시련, 고뇌와 꼿꼿한 선비로서의 내적 절제력을 갖춘 내면적 복합성이 자신의 초상에 깃들게 된 것이다.
감상자의 시선이 윤두서의 우수와 결의가 밴 강렬한 눈에 집중되듯이 렘브란트의 자화상도 영혼이 깃든 얼굴에 시선이 모아진다. 렘브란트는 초상화가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70점 이상의 자화상을 남겼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 화가도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린다. 트로츠키는 예술이 ‘신경의 작용’이라고 말했다. 예술작품을 창조하려면 사상이나 감정의 절박함이 강렬해야 한다는 얘기다. 렘브란트의 작품 역시 삶의 근본적인 모순과 갈등에 대한 반응이었다. 갓 태어난 아이를 셋씩이나 잃고, 아내를 일찍 먼저 보내고, 집과 재산을 빼앗기고, 두 번째 사랑도 다시 잃고, 하나뿐이던 아들마저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 모든 고통과 비통함이 화가의 그림에, 자화상에 영향을 준 것은 명백하다. 번영을 구가하던 부르주아지와 다르게 참혹하리만치 가난한 대중의 고통에 찬 삶에 자신의 신산한 삶을 대입하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그는 인생의 매 굽이마다 자화상을 남겼다. 이 자화상들은 한 예술가의 일생을 시각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재능있는 천재에서 원숙한 대가로, 또 고통에 잠기거나 꿋꿋한 늙은이로 변해가는 렘브란트의 인생역정을 기록하고 있다. 아일랜드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마땅한 모델이 없어 자신을 모델로 한 자화상을 그렸다고 했지만 화가들의 자화상은 내면 성찰의 도구였다. 어찌보면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한 나르시소스와 자화상에 천착하는 화가는 닮은꼴인 것 같기도 하다.
#현대인의 자화상, 셀카는 경박해지는 시대의 징후
윤동주는 시 ‘자화상’에서 우물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내면의식을 보여준다. 나르시스적 자기 연민의 정을 담으면서 시대의 고뇌를 인식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셀카를 통해 우리는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내가 아닌 타인에 대해 고민하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을까. 진정한 우리의 자화상은 실재하는가.
우난순 지방교열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