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돌담길]헤어질까 두려운 길?…만나지 않기엔 아까운 길

  • 문화
  • 여행/축제

[덕수궁 돌담길]헤어질까 두려운 길?…만나지 않기엔 아까운 길

안에는 서양식 건물을 품고, 밖으론 빌딩숲에 둘러싸인 궁궐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대로 고종은 대한제국과, 우리는 여름과 헤어지고…

  • 승인 2015-09-10 14:02
  • 신문게재 2015-09-11 14면
  • 박새롬 기자박새롬 기자
[주말여행]서울 덕수궁 돌담길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고, 그 말을 처음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아마 그 말이 두려워 걷지 못하는 연인이 있을 것이고, 그런 것쯤이야 하고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도 있을 것이다. 9월의 주말. 덕수궁 돌담 안과 밖에는 연인과 친구, 가족이 있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다고,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는 노래했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자리를 더듬어야 할 것 같은 곳. 쓸쓸한 속설과 그리운 노랫말이 맞다면 저들은 무엇과 헤어지게 될까.

덕수궁의 입구는 대한문. 입장료는 1000원이니 퇴계 선생 한 분만 모셨다. 궁궐이 멀리 보이는 반듯한 길 옆 나무들이 푸릇푸릇하다. 하늘이 높고 바람이 선선해도 녹색이라면 아직 여름과 만나고 있는 기분이다. 오른쪽 덕홍전과 함녕전 추녀마루 위 토우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나쁜 기운을 쫓아내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귀여운 마스코트 같기도 하고 빌딩숲에 갇힌 직장인의 초상 같기도 하다.

덕수궁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후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와 러시아 공사관에서 옮겨온 고종 때, 이렇게 두 번 궁궐로 사용됐다. 고종이 왕위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경운궁이었다가 덕수궁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개화 이후엔 교회, 학교, 공관, 그리고 현대에는 신문사, 기업 건물들이 옆자리에 들어섰다. 옛 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외부, 다름에 둘러싸인 곳. 경복궁이나 창경궁과 달리 궁안에 서양 건축이 있는 것도 그런 탓이겠다. 안 쪽의 이국적인 건물 정관헌은 러시아 건축가가 설계한 건축물로 고종이 커피와 음악을 즐겼던 곳이다. 화려한 장식과 무성한 나무. 한복입고 셀카에 열중한 한국 아가씨들과 배낭을 짊어진 외국 관광객들이 어우러졌다. 한국의 궁이 아닌 외국의 어느 나라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유럽같은 건물 석조전엔 유럽 관광지처럼 인파가 몰렸다. 황실의 공적인 업무와 가족 공간으로 사용됐던 건물이다. 창문 안쪽으로 주황색 빛으로 화려한 귀빈실이 보였다. 예약을 해야만 입장할 수 있어 아쉽게 발길을 돌렸다. 계단 아래엔 배롱나무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백일을 피는 여름꽃. 진분홍 꽃잎이 반쯤 떨어진 백일홍 앞에서 등산복을 입은 아주머니들이 사진찍기에 열중했다. 궁궐 구경보다 꽃구경이 더 한창인 모습에 웃음도 나왔지만 문득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년에 다시 볼 수 있는 꽃인 걸 알지만, 지금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 역시 우린 안다. 헤어지고 싶은 순간들도 있지만 붙잡아 두고픈 순간이 많은 게 삶이지 않은가. 꽃이 피어있고, 분수가 샴페인처럼 늦여름의 축포를 쏘아 올리는 오늘을, 우리는 사진으로 부여잡고 싶은 거다.

궁을 벗어나 돌담을 따라 걸었다. 한국관광공사가 '연인들이 걷기에 더없이 좋은 곳'으로 소개하는 아이러니한 관광지이자 통행로. 대한문 옆에는 예술가 한 분이 있는데 손이 없는 한쪽에 조각하는 도구를 끼우고 나무에 글과 그림을 새긴다. 마음을 다독이는 문구가 그의 손끝에서 깊어져 간다. 오래 전부터 늘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 앞으로도 덕수궁 앞길과 헤어지지 않는 풍경이었으면 싶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선득해진 공기에서 가을 냄새가 났다. 이렇게 여름과 헤어지는 구나. 서울시청 별관의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는 정동길. 삼삼오오 걷는 사람들이 쓴 우산이 동그라미가 되어 거리를 메운다. 그들 중엔 덕수궁에 종종 바람쐬러 나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다시는 오지 않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도 누군가와는 평생을 만나지만 또다른 누군가와는 어느날 헤어져 다시 만나지 못하지 않던가.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그 말은 맞았다. 고종은 대한제국과 헤어져야 했고, 꽃은 이별을 고하며 떨어졌으며, 우리는 여름과 헤어졌으니까.

그러나 너무 아쉬워하지는 말자. 헤어짐은 쓸쓸하지만 우린 가을을 만났고, 어느날 다시 덕수궁을 찾아 여름의 추억에 젖을 수 있을테니까.

▲가는길=열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서 지하철 1호선으로 한 개 역만 가면 시청역이다. 1번 출구로 나와서 163m만 걸으면 대한문이다.

▲먹거리=대한문 바로 옆에 줄서서 먹는 벨기에 와플 집이 있다. 궁 옆이니까 한식을 먹어야 할 것 같다면 그 옆집인 할머니국수집을 추천한다.

글·사진=박새롬 기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가을단풍 새 명소된 대전 장태산휴양림…인근 정신요양시설 응급실 '불안불안'
  2. [사설] 의료계 '정원 조정 방안', 검토할 만하다
  3. [사설] 충남공무원노조가 긍정 평가한 충남도의회
  4. 대전사랑메세나에서 카페소소한과 함께 발달장애인들에게 휘낭시에 선물
  5. 제90차 지역정책포럼 및 학술컨퍼런스 개최
  1. '한국탁구 국가대표 2024' 나만의 우표로 만나다
  2. 국방과학일류도시 대전 위한 교류장 열려
  3. 충남대병원 응급의학과 학술적 업적 수상 잇달아…이번엔 국제학자상
  4. 건양대병원, 시술과 수술을 한 곳에서 '새 수술센터 개소'
  5. [기고] 공무원의 첫발 100일, 조직문화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며

헤드라인 뉴스


아침밥 안 먹는 중·고생들… 대전 45% 달해 ‘전국 최다’

아침밥 안 먹는 중·고생들… 대전 45% 달해 ‘전국 최다’

대전지역 청소년들의 아침식사 결식률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적극적으로 대응해 학생들의 건강 증진이 절실한 상황이지만 대전교육청은 바른 식생활 교육을 축소한 것으로 나타나 대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26일 교육부 2024 청소년건강행태조사 분석 결과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학생들의 아침식사 결식률은 지난해보다 1.3%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해당 조사는 전국 800개 표본학교의 중·고등학생 약 6만 명을 대상으로 흡연, 음주, 식생활, 정신건강 등에 대해 자기기입식 온라인조사를 통해 진행됐다. 대전지역 학생들의 아침..

[기획] 대전, 트램부터 신교통수단까지… 도시균형발전 초석
[기획] 대전, 트램부터 신교통수단까지… 도시균형발전 초석

대전시가 충청권 메가시티 완성의 시작점인 광역교통망 구축에 힘을 쏟기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다. 도시철도 2호선 트램부터 신교통수단 시범사업 등을 추진하면서 도시균형발전 초석을 다지는 것을 넘어 충청 광역 교통망의 거점 도시가 되기 위한 준비에 나섰다. 28년 만에 도시철도 2호선 트램이 올해 연말 착공한다. 도시철도 2호선은 과거 1995년 계획을 시작으로 96년 건설교통부 기본계획 승인을 받으면서 추진 됐다. 이후 2012년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면서 사업이 물꼬를 틀 것으로 기대됐지만 자기부상열차에서 트램으로 계획이 변경되면..

대전 유통업계, 크리스마스 대목 잡아라... 트리와 대대적 마케팅으로 분주
대전 유통업계, 크리스마스 대목 잡아라... 트리와 대대적 마케팅으로 분주

대전 유통업계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겨냥한 크리스마스트리와 대대적인 마케팅으로 겨울철 대목을 노리고 있다. 우선 대전신세계 Art&Science는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 26일 백화점 1층 중앙보이드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선보였다. 크리스마스 연출은 '조이 에브리웨어(Joy Everywhere)'를 테마로 조성했으며, 크리스마스트리 외에도 건물 외관 역시 크리스마스 조명과 미디어 파사드를 준비해 백화점을 찾은 고객이 크리스마스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도록 했다. 대전 신세계는 12월 24일까지 매일 선물이 쏟아지는 '어드벤..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12월부터 5인승 이상 자동차 소화기 설치 의무화 12월부터 5인승 이상 자동차 소화기 설치 의무화

  • 첫 눈 맞으며 출근 첫 눈 맞으며 출근

  • 가을의 끝자락 ‘낙엽쌓인 도심’ 가을의 끝자락 ‘낙엽쌓인 도심’

  • ‘우크라이나에 군사지원·전쟁개입 하지 말라’ ‘우크라이나에 군사지원·전쟁개입 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