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교수는… 1959년생. 대전 보문고·한국체육대 체육학과 학·석·박사 졸, 1977년 3월~1985년 1월 대한민국 레슬링 국가대표, 미국 시카고 스티븐슨하이스쿨 레슬링 코치, 단국대·영남대·건양대·국민대·인천대 강의, 대덕대 사회체육과 겸임교수·초빙교수·전임강사, 현 대덕대 생활체육과 교수. |
고등학생때 처음 접했던 레슬링, 그리고 서른이 넘어 뒤늦게 시작한 공부, 처음 강단에서 학생 눈도 못마주칠 만큼의 아찔했던 기억까지.
그가 택한 방법은 늘 정공법이었다. 운동선수 출신 답게 그는 땀의 결과를 믿었다. 무서운 집중력과 무한 반복 연습으로 그는 고등학교 2학년때 창단멤버로 입문한 레슬링에서 이듬해 태릉선수촌에 입촌해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했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는 전교에서 꼴찌에서 세 번째였고, 성실성이 결여됐다고 혹평을 얻었던 그였지만 서른이 넘어 시작한 공부로 박사 학위까지 따냈다. 이제는 교수가 돼 제자들을 길러낸다. 여기에 그는 열정을 담았다. 그래서 각자의 인생에서 넘어져 의기소침해 있는 제자들이 그를 발판삼아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운다. 바로 이종영 대덕대 생활체육과 교수의 얘기다. 레슬링 선수에서 전문대 교수로 제자들을 길러내는 그를 만나 그만의 교육 철학을 들어봤다. <편집자 주>
▲레슬링을 만나다=다부진 체격의 이종영 대덕대 교수는 그의 전직을 듣지 않아도 첫 인상만으로도 운동선수였을 지난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쪼그라진 귀와 작은 체구가 눈에 들어 올 때쯤이면 레슬링 선수였던 그의 지난 모습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실제로 이 교수는 몬트리올 레슬링 금메달 리스트인 양정모 선수와 LA올림픽 금메달리스티인 유인탁 선수 등과 선수촌과 함께 한솥밥을 먹으며 선수 생활을 했다.
서른 넘어까지 조폐공사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갈 만큼 레슬링은 그에게 전부였지만 시작은 보문고 재학중인 2학년, 학교에 레슬링부가 만들어진 후 창단멤버로 들어가 시작했으니 그리 빠른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 태릉선수촌에 입단할 만큼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경기장에서 맨몸으로 오로지 힘과 기술만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하는 레슬링이라는 종목이 그에겐 어떤 매력이 있었을까.
이 교수는 “레슬링은 인체와 과학이 어우러진 융합된 운동능력을 발휘하는 스포츠의 결정체”라고 말한다.
“인체는 관절과 근육, 거기에 작용점이 있는데, 인체와 역학을 제대로만 이용하면 잘할 수 있는 운동이거든요. 우리가 체력적으로 서구인들에 비해 약하지만 과학과 인체만 잘 이용하면 세계도 제패할 수 있고요. 실제로 세계 선수권이나 올림픽에서 최초로 금메달을 따낸 종목도 바로 레슬링이에요.”
현직에서는 떠났지만 레슬링에 대한 열망은 여전히 크다. 대덕대에 교수로 부임해서도 이 교수는 한동안 여자레슬링부를 이끌기도 했다. 당시에 4년제 대학 못지 않는 성적도 냈다. 기회가 닿는다면 언젠가는 제자들을 통해 다시한번 레슬링을 지도하고 싶은 바람도 갖고 있다.
▲모든 것은 반복=레슬링 선수였던 이 교수가 강단에 선 계기는 1년동안의 외국에서의 지도자 경험이 컸다. 1988년 무렵 미국 스티븐슨하이쿨 측에서 학생들의 운동을 지도하는 교사로 이 교수를 채용했다. 동시에 시카고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조폐공사에서 편안하게 월급받고 근무하는 것도 좋았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좋았어요. 당시 은사님께서 공부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씀도 해주셨고요.”
사실 이 1년 동안의 경험은 그동안 엘리트 운동만 해온 이 교수로서는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초등학생때부터 공부와는 단절시키고 무조건 운동만 시키잖아요. 그래서 합숙 훈련을 시키고 운이 좋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다 한들 은퇴를 하면 정상적인 생계 유지조차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미국에 가서 보니 스포츠가 클럽식으로 운영이 되고 있더라고요. 또 공부를 못하면 학습 지원 향상 프로그램이 있어서 운동선수로 활동해도 나중에는 의사나 변호사로 활동을 하게 되고요.”
소모품으로 버려지는 우리나라의 운동선수로의 현실을 깨닫게 된 이상 그는 죽기살기로 공부에 매진했다. 하지만 운동이 전부였던 그가 박사 과정을 준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운동을 해보니 공부의 밑바닥이나 운동의 밑바닥은 똑같아요. 결국은 반복 연습이거든요. 지금도 제자들에게 그 얘기를 해요. 운동잘하는 사람은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운동에 할애를 한 것이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공부에 그만큼의 시간을 할애한 것이라고요.”
기술쓰는 법을 가르치다 처음으로 학문적으로 강단을 섰을때는 식은땀이 날 정도로 당황했다.
“단국대 연극영화학과에서 시간강사를 했는데 거의 대부분 여학생들이라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처음엔 정말 어색했죠. 하지만 이것도 반복하다보니까 결국엔 되던데요?”
▲교사를 양성하는 전문대=이 교수가 대덕대와 인연을 맺은지는 16년째가 돼간다. 시간강사를 시작으로 초빙교수를 거쳐 이제는 생활체육과의 학과장이 됐다. 그리고 설립 21년이라는 짧지 않은 역사 속에서 12명의 현직 교사를 배출한 기록을 세웠다.
전문대에 진학하는 학생들 중 상당수가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부정하는 의기소침한 학생들이 많다. 이 교수는 그런 학생들에게 동기부여를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연구실 한켠에 조금은 부끄러운 그의 고교시절 생활기록부를 갖고 있다. '수'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그의 성적표 한켠에는 성실성이 결여되고, 교우 관계가 좋지 않고 협파력이 좋지 않다는 각 학년별 교사의 총평이 적혀 있다.
“사실 생활기록부만 보면 저는 문제아거든요. 이걸 보여주면서 아이들한테 그래요. 내가 그랬는데, 해보니 되더라. 사실 천재와 바보는 백지한장 차이라고 생각해요. 그 차이를 줄여줄 수 있는 것은 반복된 학습이고 그걸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동기부여거든요.”
그 '동기부여'를 그는 '열정'이라고 했다. “열의는 단순히 열심히 가르치는 것, 열심히 하는 것이라면 열정은 열과 정성이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지금도 이 교수는 땀의 결과를 믿는다. “지금도 아이들에게 말해요. 평상시 열심히 하면 결과물은 좋다고요. 거기에 열정을 담으면 공부나 사회생활, 친구를 사귀는 것도 그렇고 안좋을 수가 없거든요. 결국엔 정이죠.”
매사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는 이 교수의 앞으의 계획은 선수로서 못다한 아쉬움을 언젠가는 풀어보고 싶다. “지금은 여건은 안되지만 제가 이루지 못한 선수로서의 꿈을 제자들을 통해 이뤄보고 싶어요. 또 12명 정도의 현직 교사를 배출했으니 앞으로 충청권에서 최고의 학과를 만들어 보자는 바람도 있습니다.”
매사에 무서운 집중력과 반복된 학습만큼 왕도는 없다고 믿는 이종영 교수.
그래서 그는 운동을 할때도 후배들보다 솔선수범으로 나섰고, 뒤늦게 공부를 할때도 남들보다 열배 스무배 책과 씨름했다. 남들보다 일찍 인생에 넘어진 제자들을 위해 그리고 후배들을 위해 조금은 편한길이 무엇인지 더 처절하게 고민한다. 그렇게 열정의 그가 내딛는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대담·정리=오희룡 교육팀장·사진=이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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