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 당시 장렬하게 순국한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삶과 뜻을 알리기 위해 애쓰고 있는 남균우(77·사진)씨를 만났다.
남 씨는 당진 출신으로 교단에 서오다 1999년 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그 뒤 의령남씨 충장공파 대종회로부터 남이흥 장군의 사적을 현대의 젊은이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써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고 그 일을 계기로 2011년 남이흥 장군의 전기 '남이흥의 장렬한 순국' 을 짓게 됐다.
남이흥 장군의 직계 자손이기도 한 남 씨는 “시인이자 소설가로 활동한 점을 눈여겨본 대종회에서 연락을 해왔다”며 “직계자손이 쓰면 신빙성이 없고 객관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올까봐, 각종 자료를 조사하고 연구하는데 더욱 철저히 임했다”고 덧붙였다.
특히 “전기를 집필하며 장군의 높은 뜻을 더욱 실감하게 됐다. 앞으로도 꾸준히 장군의 우국충정의 삶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남 씨는 “남이흥 장군과 부친 남유 장군은 아들과 아버지가 무장으로서 나라를 지키다 순국한, 역사상 보기 드문 경우”라고 강조하며 고귀한 그 뜻은 앞으로도 계속 기억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이흥 장군은 정묘호란(1627)이 발발하자, 평안남도 안주성에서 3000여 군민으로 후금의 3만여 대군과 맞서 싸웠다.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할 위기에 처하자 성안에 있던 화약고에 불을 붙여 수천여 후금군을 폭사시키고 휘하 장병과 함께 장렬하게 순국했다.
부친 남유도 유명한 무장으로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함께 노량해전에 출전했으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뒤 사흘 후인 1598년 11월22일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그 아들은 정묘호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순국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2세대에 걸쳐 충신임을 기려 '양세충신정려'가 내려졌다.
당진에 남이흥 장군과 부친 남유의 묘가 함께 모셔져 있으며 남이흥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장사가 있다. '남이흥 장군 문화제'도 매년 당진에서 열리고 있다.
김의화 기자 joongdonews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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