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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에 접어든 때, 유난히 뱃살이 두둑한 친구가 내게 속삭인 말이었다. 그닥 뚱뚱하진 않지만 타고난 뱃살 때문에 친구는 늘 고민이었다. 뱃살이 출렁거리는 몸을 어떻게 남자에게 보일수 있냐는 거다. 그런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고 푸념했다. 난 까르르 웃어버렸지만 살은, 특히 여자들에게 일생 최대의 과제다. 의아한 점은 친구가 살찌는 거에 대해 두려워하면서 다이어트하는 걸 보지 못했다. 친구는 나랑 밥먹을 때 나 못지 않게 잘 먹는다.
그래서 언젠가 친구에게 물어봤다. 넌 다이어트 안하냐고. “사실은 너 만날땐 맘껏 먹지만 집에서는 거의 안 먹어.” 학교 다닐 때 집에서 밤새워 공부하면서 학교 와선 공부 하나도 안하는 척 놀면서 다른 친구 공부하는 거 방해하는 얘들과 같은 심리인가? 아니면 다이어트 했다가 실패하면 쪽팔려서? 한번은 친구가 독하게 맘먹고 한 1년 헬스장에서 살았다. 그랬더니 살이 쪽 빠져서 날씬해졌었다. 친구는 몸매에 대한 자신감이 생겨 그동안 못입어본 바디라인이 드러나는 옷을 마구 사입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운동을 안하니까 요요현상이 와서 살 빠지기 전보다 더 살이 쪄버렸다.
#기름진 음식은 도처에 넘쳐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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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살에 대한 처절함은 목욕탕에서도 벌어진다. 이제 자식들 다 키워놓고 시간.경제적 여유가 있는, 매일 오전 반나절을 목욕탕에서 사는 ‘아줌마’들이 있다. 얼음을 꽉 채운 커피가 담긴 물통을 옆에 놓고 마시며 분홍색 비닐을 허리에 감고 사우나실·온탕을 들락거린다. 실제로 그 비닐이 살을 빼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대화의 화제는 단연 살이다. “에이구, 요 며칠 신경 안쓰고 막 먹었더니 3kg이나 쪘어.”, “어메 좀 쪘네요. 형님은 그래도 나보단 나아. 내 배좀 봐요, 옷이 작아서 못입어.”, “에휴, 나이 먹으니까 먹는 족족 살로 가니 원! 운동해도 잘 안 빠지고….” 살찌는 걸 한탄하면서 마무리는 점심에 맛있는거 먹으러 가자는 의견으로 모아진다. “보문산 밑에 칼국수집 수육이 쫀득쫀득하니 참 맛있다대. 그거 먹으러 갑시다.”
먹을거리가 풍부한 현대사회에서 비만은 질병으로 간주된다. 기름진 음식이 도처에 넘쳐나 그 유혹을 뿌리치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다. 그런만큼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지금이야 날씬한 몸이 대우받는 세상이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빌렌도르프 비너스’라는 조각이 있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구석기시대의 것으로 가슴은 터질 듯하고 배는 불룩해서 허리가 그야말로 ‘배둘레햄’이다. 그 시대는 먹을 게 부족했기 때문에 뚱뚱한 몸이 미의 기준이 됐을 것이다. 멀지 않은 서양의 르네상스 시대나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만 봐도 터질 듯한 허벅지와 엉덩이, 불룩한 뱃살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르누아르의 ‘목욕하는 여인들’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뚱뚱하다고 할 정도로 풍만하기 그지없다. 조선시대의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 속 여인들도 적당히 통통한 몸이다.
#살과의 전쟁은 누구를 위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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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tvN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방송 캡처. |
비만이 미덕인 시대는 이제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비만한 사람은 굴욕과 냉혹한 시선 속에서 살아야 하는 세상이 됐다. 케이블 채널 ‘렛미인’은 비만은 죄라는 등식을 시청자에게 강요한다. 뚱뚱함은 사회의 낙오자요 인생의 실패자로 낙인찍는다. 지방 흡입술 등 온갖 의학기술을 동원해 살을 뺀 전후를 지옥과 천국이라는 비교대상으로 만들어 시청자들에게 비만은 곧 죄라고 세뇌시킨다.
왜 이렇게 우리 사회가 살과의 전쟁에 목숨 걸게 됐을까. 현대는 미디어가 트렌드를 이끈다. CF는 전지현, 현아 등 바비인형같은 모델들을 등장시켜 대중의 눈높이를 조종한다. 쇼프로나 드라마도 잘빠진 멋진 몸매의 연예인들이 누비고 있어 이를 보는 대중들은 다이어트식품과 살빼는 약을 사는데 주머니를 기꺼이 연다. 그러나 지금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뚱뚱하다. 약을 복용하면서 살을 빼도 다시 찐다. 비만학자들은 살이 빠진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이라는 절망적인 처방을 내놓는다.
한편에선 적당한 비만은 생명을 위협하지도 않고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위험요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돈에 눈이 먼 다이어트식품 회사와 의사들의 속임수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렇지만 현실은 너무 멀리 와버렸다. ‘막돼먹은 영애씨’에서 영애 엄마와 제부의 대화 한토막. “영애가 뚱뚱해서 여기 남자들은 싫어하잖아. 한국놈 중에 영애 좋아하는 놈이 없잖아.”, “여기서 뚱뚱하고 못생긴 처형이 거기(미국) 가서 통하겠냐구요.” 이제는 고전이 된 라캉의 말은 지금이 더 유효하다. “내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우난순 지방교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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