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다'는 최종태 화백(83·서울대 명예교수·이동훈 미술상 운영위원장)은 '한국 구상조각계의 거장'이라 불린다. 올해로 그의 나이 83세. 일생을 인생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 고민해온 최 화백은 삶과 종교, 예술이라는 주제를 평생의 과제로 삼고, 예술작업을 해왔다. 최 화백은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고민했다. 자신에게 엄격했던 만큼, 스스로에게 싸움을 걸었고, 세계미술사와는 투쟁을 벌였다. 그를 예술인의 길로 걷게 하고, 예술인으로서의 이정표를 세워준 스승들의 굴레에서 탈출하기 위해 애쓴 최 화백은 내면의 심연에 이르는 곳에서 답을 구해왔고, 지금도 그 작업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때문일까. 그의 작품에는 깊은 인간 삶 내면의 모습이 담겨있고, 인간만의 생명력이 느껴지는 듯하다.
이런 최 화백의 조형세계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대규모 회고전이 다음달 1일부터 11월 29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다. “아름다움은 신성(神聖)의 영역”이라는 최 화백이 지난 20일 이동훈 미술상 운영위원회를 주관하기 위해 대전에 왔다. 이에 중도일보 편집국에서 최종태 화백을 만나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편집자 주>
-최 위원장님께 신앙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요.
▲신앙을 어떤 의미라고 말씀드리긴 어렵고, 그 의미와 진실을 평생 찾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하지만 그 심연의 세계는 깊어도 너무 깊었죠. 어렸을 때부터 저에겐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습니다. 일평생 3가지 큰 의문을 안고 살아왔는데, '종교라고 하는 것', '예술이라고 하는 것', '인생이라고 하는 것' 이 그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추구하고 있는 제 작품세계의 테마인데요. 이제와 돌이켜보니 이 세가지는 각각 따로따로가 아닌, 마치 하나의 덩어리가 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최 위원장님은 언제부터 종교를 갖게 되셨나요.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주변 환경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서울대 미대 진학 당시였는데, 한국전쟁 이후라서 나라는 가난하고, 집안도 어려웠습니다. 당연히 제 수중에는 돈이 없었죠. 그때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먹고사는 문제에서부터 세계미술사에 대한 고민 등 여러가지 당면한 문제들이 저에게 닥쳐왔습니다. 그때 우연히 불교사상 강좌를 처음 듣게 됐는데요. 외부 강좌를 직접 찾아다닐 정도로 심취했었습니다. 불교경전인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외워버린 후 그해 겨울방학 크리스마스 때 고향인 대전으로 내려와 불교당을 찾으려고 다 돌아다녔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천주교를 접하게 된거죠. 대흥동 성당에 가게 됐는데 신부님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다 덮어놓고 천주교 신자가 됐죠. 신부님이 지어주신 제 세례명은 요셉입니다. 종교로부터 받은 영감이 제 작품의 주조를 이루는 성상(聖像) 조각에 많은 영향을 끼친 셈이지요.
-최 위원장님께서 미술계의 길로 들어선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지요.
▲제가 대전사범학교 2학년 시절 우리 학교 미술 선생님이셨던 이동훈 선생님을 만나 그림의 길로 들어서게 됐습니다. 이동훈 선생님께서 미술시간에 제가 그린 그림을 말그대로 '픽(Pick·택하다)'하셨던겁니다. 이 일을 계기로 이동훈 선생님과의 특별한 인연이 시작된거죠. 제가 미술을 택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인 셈입니다. 사실 저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문학도 좋아하고 음악도 좋아하거든요. 그렇지만 이동훈 선생님과의 만남을 계기로 제가 그림의 길을 걷게 된거죠. 선생님께서는 저를 매우 아껴주시고 사랑해주셨고, 저는 사범학교 시절 내내 미술반 활동을 하게 됐습니다.
-최 위원장님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흥미와 재능이 있으셨나봅니다.
▲미술적인 재능은 갖췄다고 봅니다. 문학, 미술, 음악에 대한 재능을 두루두루 갖췄다고 남들은 말하죠. 그때 만약 문학쪽으로 갔으면 지금 인생이 어떻게 바뀌어져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그 삶을 느껴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음악도 매우 좋아했는데요. 클래식을 즐겨 들었습니다. 사실 미술과 문학, 음악 이 3가지는 지금도 놓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죠. 제 작업실에는 라디오가 있어 작업 중에는 늘 음악을 듣곤 합니다. 사범학교 다닐 때도 미술반 활동을 주로 하면서도 음악반과 문학반도 자주 왔다 갔다 했습니다. 합창반도 다녔는데, 노래 실력이 별로여서 결국 합창은 포기한 기억이 납니다(하하하).
-최 위원장님은 다재다능하고 특별한 예술적 재능을 갖고 계신데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제 부모님은 예술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으십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선 평생 농사를 지으셨죠. 저는 5남매 중 장남인데, 예술과 관련 있는 일을 하는 형제는 저 이외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외갓집 내력이 좀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싶기는 합니다. 외할아버지께서 평생 글을 쓰시는 분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최 위원장님께 '이동훈'이라는 스승님은 어떤 존재인가요?
▲이동훈 선생님을 만났을 당시 제 세계에선 이동훈 선생님이 최고셨습니다. 그만한 분이 안계셨죠. 저는 선생님의 모든 것을 다 이어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동훈 선생님은 자기 고집이 확실한 분이셨고, 순박함을 추구하셨습니다. 절대로 불의와는 타협을 하지 않으셨죠. 저는 이동훈 선생님께 이런 기본적인 인생의 가치관을 배웠습니다. 아니 배웠다기보다는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전사범 시절 이동훈 선생님을 만났다면 서울대 미대 재학시절엔 조각 부문의 김종영 교수님과 회화 부문의 장욱진 교수님을 만났는데 이 두 분도 독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매우 성격이 세고 강하신 분들입니다. 제가 평생 스승님으로 모신 세 분이 바로 이 분들이십니다.
-최 위원장님께서도 스승님들을 본받아 고집이 세시고, 불의와는 절대 타협을 하지 않는 성격이신건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좋은 것은 얼마든지 받아들이지만, 나쁜 것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습니다. 흔히 정치인들은 타협을 하는데요. 예술가들은 타협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손해를 볼때도 많이 있지만 저를 지켜야만 저 자신만의 세계와 철학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야 자유스럽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술은 결국 저 자신을 표현하는 건데 나쁜 것을 받아들여선 안되죠. 다만 '좋은 것'은 얼마든지 수용합니다.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는 작품활동 시간이 최 위원장님께 행복으로 다가오는지 궁금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창작의 고통을 감내하는 시간은 매우 힘들죠. 기쁨이나 행복이라는 감정보다는 고통의 시간이나 힘든 시간으로 표현하고 싶네요. 지금은 괜찮긴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즐거움이나 희열을 주는 시간만은 결코 아니었답니다. 지금 이 자리까지 오는 과정은 스승님들을 뛰어넘고, 세계예술사를 소화해내면서 그 핵심을 뚫고 지나간 시간들이 모인 결정체입니다. 지금 돌아보면 세계미술사를 배우고 익히는데 30년이 걸렸습니다. 30년이 흐르고 난 뒤 비로소 제나이 50에 제 자신을 찾는 길로 들어서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배우고 익힌 것을 소화하고 제 몸에 익히는 과정에서 또 30년이 걸렸습니다. 역사를 뒤져 좋은 것을 익혀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다보면 제 것이 아닌 외부의 것이 들어와 있죠. 외부의 것을 다시 내보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소화해야 합니다. 제 눈으로 보고, 제 마음대로 그리는 과정이 바로 그거죠. 합해보면 모두 60년이 걸린 셈이네요. 배우고 익히는데 30년, 소화하고 새기는데 30년(하하하).
-와, 예술계에서 정점을 찍기까지 장장 60년의 시간이 소요됐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6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완벽하진 않습니다. 예술이라는 게 저 자신을 타고 넘어야 하는 것이죠. 뛰어 넘지 못하거나 제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실패합니다.
제 스승님인 이동훈 선생님과 김종영 교수님, 장욱진 교수님 안에만 머물러 있었으면 제가 어떻게 됐겠습니까. 스승님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거기서 탈출하려고 노력했죠. 그 분들이 하시고자 했던 것들, 생각했던 것들을 속속들이 알아냈습니다. 그분들의 모든 것을 알아야 제 속에서 떠나보낼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스승님들을 떠나보내는데 20년이 걸렸습니다.
생각해보면 무섭고 끔찍한 일이기도 한데요. 쉽게 말씀드리자면 저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특별한 체험을 말씀드리자면 제 나이 50이 되던 해에 저 하늘에 제가 있음을 보게 됐습니다. 저 최종태가 땅에 떡하니 서있는데, 하늘 가운데서 저를 향해 서있는 최종태를 본겁니다. 반가워 하던 그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뭔가를 배우러 나갔던 제가 완전히 소화를 한 후 저에게로 되돌아오는 신호였던 셈입니다. 이후 외부와의 투쟁이 사그라지니까 작품이 훨씬 편안해졌습니다. 완전한 저로 돌아오니까 편하고 즐겁게 작품을 할 수 있었습니다.
-최 위원장님만의 생각을 순수하게 지켜오시다보니 어려운 점도 많이 있으셨을것 같습니다.
▲솔직히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나름대로 생각하는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타협을 안하다보니 마음고생이 심한 편이었는데요. 저뿐만 아니고 제 선생님들도 그렇게 사셨으니까 저 역시 후회는 없습니다. 다만 내면과의 치열한 싸움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인생은 거대한 파도 물결에 한 순간에 휩쓸려갈 수 있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 항상 거슬러가야 합니다. 역류를 해야만 저 자신을 지킬 수 있는거죠. 그게 선을 따르고자 하는 제 고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한 힘은 본래적인 것인데, 배워서 되는게 아닙니다.
-최 위원장님을 멘토로 모시고 따르는 제자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학창시절 그랬던 것처럼 제자들은 제 발로 걸어가고, 일어서야 합니다. 스승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최 위원장님께서 작품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용감하게 말씀드리자면 성스러운 것, 아름다움은 신성의 영역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림도 물론 사랑과 기쁨을 원천으로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공부 두 가지는 종교와 예술이라고 할 것입니다. 빛은 사랑이고 기쁨이고 생명입니다. 저는 일생동안 네번의 강을 건넜는데요. 첫번째 강은 어린시절의 꿈같은 강이고, 두번째 강은 질풍노도 치는 강이고, 세번째 강은 떠났던 제가 저로 되돌아오는 강이고, 네번째 강은 생명의 강 은총의 강입니다.
-최 위원장님, 83년 생애를 반추하시면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갖게 되셨는데요. 이번 회고전에 대해 소개해주시지요.
▲제 일생이 담겨있는 회고전입니다. 입체와 평면 작품 모두 합해 200여점이 전시될 예정입니다. 회화 작품 50점과 조각 작품 150점을 통해 저만이 개척한 조형세계를 심도 있게 보여드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8월31일 오후 4시에 오픈전을 가질 계획이랍니다. 11월29일까지니까 많이들 오셔서 관람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최종태 화백은…
▲1932년 12월 7일 대전시 대덕구 오정동 출생 ▲1946년 회덕초등학교 졸업 ▲1952년 대전사범학교 졸업 ▲195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 ▲1966년 공주교대 교수 ▲1967년 이화여대 미대 교수 ▲1970년 서울대 미대 교수 ▲1991년 한국가톨릭미술가협회장 ▲1998년 서울대 명예교수 ▲2002년 김종영미술관 관장 ▲현재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유영국 문화재단 이사, 김종영미술관 관장·우성 김종영기념사업회장, 이동훈 미술상운영위원장·이동훈 기념사업회장 ▲1960년 국전 문교부 장관상, 1964년 충청남도 문화상, 1970년 국전 추천작가상, 1989년 서울시 문화상, 1998년 국민훈장 동백장, 200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2008년 가톨릭미술상 특별상, 2008년 은관문화훈장, 2011년 대한민국 미술인상 대상
대담=한성일 취재 3부장(부국장)
정리=송익준ㆍ사진=이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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