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도연이 지난 5일 오후 서울 광진구 자양동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 열린 영화 '협녀:칼의 기억'언론시사회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연합뉴스 |
만지면 서걱거리며 금방 바스라질 것 같은 위태롭게 흔들리던 젊은 날, 전도연은 한때 내게 위안이었다. 세상 모든 이들이 삶의 환희에 차 있더라도 전도연은 내가 느끼는 고통의 깊이를 가늠할 거라고 자의적으로 해석해 버렸다.
영화에 데뷔하기 전 1996년 TV 일일드라마 ‘사랑할 때까지’ 주인공을 맡은 전도연은 이전의 드라마에서 보던 것과는 좀 달랐다. 아버지와 단둘이 살며 삶의 버거움에서도 착실한 딸로 나오는 캐릭터였다.
▲전도연이 주인공을 맡은 TV 일일드라마 ‘사랑할 때까지’ . |
당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박근형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드라마에서 아버지로 분한 박근형은 전도연이 캐스팅됐다는 걸 알고 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전도연은 탤런트지 배우가 아니라고. 드라마를 찍으면서 박근형은 전도연의 미숙한 연기에 대해 가차없이 지적하며 혹독하게 야단치곤 했단다. 그 정도면 나이어린 여자 연기자는 눈물 쏙 뺄만도 하건만 묵묵히 대선배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면서 박근형은 전도연을 대성할 연기자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저그런 연기자인 줄 알았는데 감춰진 보석이었네
▲왼쪽부터 전도연의 출연작 '접속', '내마음의 풍금', '밀양', '집으로 가는 길' |
아니, 영화 ‘접속’이 개봉되기 전 TV토크쇼 ‘서세원쇼’에 영화 홍보차 출연했을 때만도 지금의 전도연을 감히 예측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서세원은 ‘접속’에 동반 출연한 전도연과 추상미를 앉혀놓고 대놓고 전도연이 추상미에 비해 미모가 달린다고 놀렸다. 조지 거쉰의 ‘서머 타임’을 재즈가수처럼 멋들어지게 부른 추상미가 도드라져 보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서세원씨는 왜 자꾸 외모갖고 말씀하세요?”라며 전도연이 뾰로통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주연배우의 친구거나 여동생 내지는 옆집 아가씨로 나오면 딱 맞는, 연기자로선 결코 예쁘지 않은 전도연. 데뷔 초창기 비음섞인 혀짧은 말투로 잘나지 않은 몸매를 드러낸 옷차림으로 까불대는 드라마를 보면서, 그저그런 조연으로 나오다가 어느날 사라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의, 아니 대중의 그런 시각이 기우였음을 보여준 ‘접속’의 대성공은 전도연을 캐스팅한 명필름의 심재명 이사의 뚝심이 증명한다. “발군의 미모가 아닌 것은 전도연의 강점이다. 감수성이 뛰어나고 시나리오를 본능적으로 해석하고 정확하게 이해한다.”
스스로 미모가 뛰어난 배우가 아니란 걸 자각한 건지 그녀의 연기에 몰입하는 힘은 대단하다. ‘내 마음의 풍금’, ‘밀양’, ‘집으로 가는 길’을 어느 배우가 제대로 소화할 수 있겠는가. 극장에서 ‘해피엔드’를 보고나서 친구와 한동안 전도연의 연기에 대해 감탄의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주진모와의 베드신에서 격정에 못이겨 내지르는 교성이 ‘리얼’했다는 거다. 또 아파트 복도 난간에 팔을 괴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얼마나 프로다운가. 검지와 중지로 단단하게 담배를 쥐고 볼이 옴폭 파이도록 담배를 깊이 빨 때의 전도연이란! 대개의 여배우들은 연기 좀 한다고 해도 꺼리는 게 있다. 유교적인 가치관이 견고한 사회에서 아무리 강단있는 여배우라 하더라도 베드신은 자칫 평판이 나빠질 것을 우려해 소극적으로 임하게 된다. ‘썸머타임’의 김지현은 농밀한 베드신으로 한동안 구설에 올라야 했다.
#역할마다 새로운 인물 창조하는 능력은 어디까지…
▲ 제68회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한국 영화 '무뢰한'의 주연 전도연이 프랑스 칸 팔레 드 페스티발에서 열린 포토콜에 참석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CGV아트하우스 제공 >> |
캐릭터에 몰입하는 능력이 뛰어난 전도연은 그래서 역할마다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낸다. 사실 김혜수를 진정한 배우라 생각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느 역할에서나 그녀의 자로 잰 듯한 걸음걸이, 말투, 표정은 카메라를 의식하느라 분주해 보인다. 레드 카펫에서만 빛나는, 멋있게만 보이려는 연기가 관객을 거북하게 한다.
‘칸의 여왕 전도연’. 늘 따라붙는 이 수식어가 그녀에겐 족쇄일 수도 있다. 몇몇 배우에게서 대중의 기대치를 저버리면 안된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혀 그 타이틀 안에 스스로 가두는 경우를 우리를 많이 봐왔다. ‘국민배우’ 안성기는 모범가장의 전형이다. 예전에 오죽하면 전여옥은 단 한번의 스캔들이 없는 안성기가 배우로선 매력이 없다고 평했다. 강수연은 어떤가.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탄 이후 ‘월드스타’란 수식어가 버거워서였을까. 이렇다 할 영화 한번 내놓지 못하고 밤하늘의 유성처럼 스러져갔다. 뭐 88올림픽의 후광으로 베니스에서 선심쓰듯 상을 줬다는 뒷얘기도 있지만.
하지만 전도연은 그런 타이틀에 연연하지 않고 지칠 줄 모르는 연기에 대한 갈증을 토해내고 있다. 2007년 칸에서 돌아와 기자회견에서 한 얘기는 이를 말해준다. “앞으로가 중요해요. 월드스타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에요”라고 연기에 대한 열정을 강조했다. 무모할 정도로 어느 역할에나 스펀지처럼 스며드는 전도연은 변신의 여신이다. 누아르 영화 ‘무뢰한’의 김혜경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짓는 쓸쓸한 미소는 얼마나 매혹적인가. 그래서 무협영화 ‘협녀’도 기대되는 이유다.
우난순 지방교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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