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만필] 추억은 꽃보다 아름다워

  • 오피니언
  • 교단만필

[교단만필] 추억은 꽃보다 아름다워

  • 승인 2015-08-04 14:10
  • 신문게재 2015-08-05 18면
  • 류순이 당진 면천초 교장류순이 당진 면천초 교장
▲ 류순이 당진 면천초 교장
▲ 류순이 당진 면천초 교장
여름 방학으로 잠시 여유를 찾은 면천 교정에 우렁찬 매미 소리가 한낮의 고요를 달래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나도 모르게 십여 년 전의 어느 날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지곤 한다. 알싸한 찔레꽃 향기가 천지를 진동하던 날, 한 통의 요란한 전화 벨 소리가 토요일 저녁의 나른함과 여유를 깨는 일이 생긴 것이다. 전선 저쪽 건장한 사내의 갑작스러운 방문 소식이 나를 긴장시킨 거였다.

80년대 초반, 스물 두 살의 꽃 같은 청춘을 경상북도 영덕군의 조그만 산골 학교에서 어설픔 가득한 새내기 선생님으로 시작했다. 건장한 사내 음성의 주인공은 바로 그 시절 2학년 9살 꼬마였던 '이○○'이었다. 연전(年前)에 그 동기생들을 만났을 때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아이는 이미 중학교 2학년 때 좋지 않은 일로 학교를 그만 두고 대구 어딘가에서 건달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같은 마을에 살던 또래 친구들조차 그 아이의 소식을 입에 올리기조차 꺼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런데 20여 년 간 소식 한 번 없다가 난데없이 먼 대구에서 나를 만나기 위해 공주를 오고 있다는 것이다. 풍문으로 들었던 이러저러한 사연 덕분인지 알 수 없는 부담감에 짓눌리며 다음 날 점심 약속을 하고는 한결 심란해진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갑자기 날 찾는 이유가 뭘까? 다단계 판매, 공주 어딘가에 손볼 상대가 있어서 지나는 길? 혹시 사채 부탁? 유년 시절(초등 2학년) 내게 받은 상처가 있어서?'

별의별 유치한 생각과 함께 약간의 두려움도 생겼다. 솔직히 오랜만의 만남에 대한 설렘이나 기대보다는 뭔가 개운치 않은 뒷맛을 가진 채 억지로 잠을 청했다.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자 콩닥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며 부랴부랴 약속 장소로 향했다. 이미 공주 시내 모 처에서 숙박을 한 그 아이는 한결 경쾌한 목소리로 내가 알려 준 장소를 알은 체 한다.

드디어 우리는 22년 만에 해후를 했다. 하지만 그 아이의 눈빛을 본 순간 밤새 엄습했던 불안감은 일순간 사라져 버렸다. 30살의 건장한 사내 모습에서 난 분명 9살 꼬마 ○○이의 맑은 눈빛과 사람 좋은 미소를 보았던 것이다. 한아름 안겨준 새빨간 장미꽃의 아름다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덥석 마주잡은 손길에서 느껴진 따스한 체온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던 것이다. 아니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조폭, 건달' 이런 낱말 만을 떠올렸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고 선입관 때문에 불편한 마음을 가진 채 그를 만났던 나의 옹졸함과 얄팍함에 얼굴 들기가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동석한 그 애의 아내는 요즘 잘나가는 탤런트를 연상케 한 고운 얼굴로 수줍게 인사를 했다.

그간의 삶은 다소 거칠었어도 자신이 간직한 유년 시절의 추억이 너무나 아름답고 그리웠다며 속 깊은 이야기를 토해내는 모습이 나를 많이 아프게 했다. 친구들은 청소년기 행했던 잠시의 일탈 행동 때문인지 나름대로 다가가려 노력하지만 선뜻 곁을 주지 않는다며 씁쓸하게 미소 짓던 그 애의 허허로운 표정을 나는 정말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이젠 생활의 여유를 찾은 탓인지 추억을 반추하고, 사람을 그리워하며, 잃어버린 청소년기를 찾고자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그 애를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 세 시간 남짓 이야기를 하면서 오히려 내가 진솔한 인생 공부를 한 것 같았다. 사람은 누구나 사소한 잘못이나 실수나 하며 살아간다. 너그러운 마음과 따뜻한 관심은 나와 다른 사람을 변하게 한다는 진리를 다시금 일깨우는 시간이 되었다.

지금도 가끔씩 그 애가 전송한 사진 속에서 가족과의 아름다운 일상을 보는 맛도 쏠쏠하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유성 장대B구역 재개발 정비사업 '순항'
  2. 매출의 탑 로쏘㈜, ㈜디앤티 등 17개 기업 시상
  3. 국정 후반기 첫 민생토론회 위해 공주 찾은 윤석열 대통령
  4. 소진공, 2024 하반기 신입직원 31명 임용식
  5. 세종충남대학교병원, 세종권역 희귀질환전문기관 심포지엄 성료
  1.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 시작
  2. 정관장 'GLPro' 출시 한 달 만에 2만세트 판매고
  3. 한밭새마을금고, 'MG희망나눔 사랑의 김장 나누기' 행사 진행
  4. [긴박했던 6시간] 윤 대통령 계엄 선포부터 해제까지
  5. 대전 여행업계, 명절 특수에 중국 무비자 정책까지 기대감 한껏

헤드라인 뉴스


‘계엄 블랙홀’로 정국 소용돌이… 충청권 현안사업·예산 초비상

‘계엄 블랙홀’로 정국 소용돌이… 충청권 현안사업·예산 초비상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해제 후폭풍이 거세게 몰아치면서 정기국회 등 올 연말 여의도에서 추진 동력 확보가 시급한 충청 현안들에 빨간불이 켜졌다. 또 다시 연기된 2차 공공기관 이전부터 대전 도시철도 2호선 트램 건설, 충남 아산경찰병원 건립, 다목적 방사광 가속기 구축, 중부고속도로 확장까지 지역에 즐비한 현안들이 탄핵정국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전 지역 정치권의 초당적 협력과 선제적 대응이 절실하단 지적이다. 3일 오후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4일 새벽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 가결 등 밤사이 정국은 긴박하게 돌아갔..

대전시, 연말에도 기업유치는 계속된다… 7개 사와 1195억원 업무협약
대전시, 연말에도 기업유치는 계속된다… 7개 사와 1195억원 업무협약

대전시는 4일 시청 중회의실에서 국내 유망기업 7개 사와 1195억 원 규모 투자와 360여 개 일자리 창출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날 협약식에는 이장우 대전시장과 정태희 대전상공회의소 회장을 비롯해 ▲㈜아이스펙 한순갑 대표 ▲㈜이즈파크 정재운 부사장 ▲코츠테크놀로지㈜ 임시정 이사 ▲태경전자㈜ 안혜리 대표 ▲㈜테라시스 최치영 대표 ▲㈜한밭중공업 최성일 사장 ▲㈜한빛레이저 김정묵 대표가 참석했다. 협약서에는 기업의 이전 및 신설 투자와 함께, 기업의 원활한 투자 진행을 위한 대전시의 행정적·재정적 지원과 신규고용 창출 및 지역..

야 6당,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제출… 빠르면 6일 표결
야 6당,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제출… 빠르면 6일 표결

야 6당이 4일 오후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빠르면 6일부터 표결에 들어갈 수도 있으며 본회의 의결 시 윤석열 대통령은 즉시 직무가 정지된다.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은 이날 오후 2시 43분쯤 국회 의안과를 방문해 탄핵소추안을 제출했다. 탄핵소추안 발의에는 국민의힘 의원을 제외한 6당 의원 190명 전원과 무소속 김종민 의원(세종갑)이 참여했다. 탄핵안에는 윤 대통령이 12월 3일 22시 28분 선포한 비상계엄이 계엄에 필요한 어떤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음에도 헌..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철도노조 파업 예고에 따른 열차 운행조정 안내 철도노조 파업 예고에 따른 열차 운행조정 안내

  • 야 6당,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제출… 빠르면 6일 표결 야 6당,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제출… 빠르면 6일 표결

  • 계엄령 선포부터 해제까지… 충격 속 긴박했던 6시간 계엄령 선포부터 해제까지… 충격 속 긴박했던 6시간

  • `계엄 블랙홀`로 정국 소용돌이… 2차 공공기관 이전 등 충청현안 초비상 '계엄 블랙홀'로 정국 소용돌이… 2차 공공기관 이전 등 충청현안 초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