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벼꽃이 피고 낱알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할 즈음 태풍이나 비바람이 몰려와 다 자란 벼들이 논바닥에 엎어지거나 꺾이면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농부들은 벼들이 엎칠까봐 노심초사하곤 하였다. 당시까지 일반벼 품종들은 한 평에서 두 근을 수확하면 식량은 한다고 했는데, 그만큼 수확량을 늘리기가 쉽지 않아서 항상 쌀이 부족하였다.
그런 까닭에 나라에서는 보리, 콩, 밀가루 등의 혼분식을 장려하면서 수확도 많이 하고 태풍에도 잘 쓰러지지 않는 품종을 개발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그 결과 통일벼를 개발하게 되었다. 당시까지 일반벼의 수확을 높이려고 나라에서 농민들에게 소주밀식(小株密植; 모를 한 번 심을 때 작은 개수를 빽빽하게 심는 방법)이나 시비법 개선(施肥法 改善; 비료를 주는 새로운 방법) 등을 장려하거나 지도하면서 단위면적당 벼 수확량을 늘리려고 애를 쓰곤 하였다.
하지만 일반벼 품종은 보통 한 평에 세 근 정도를 수확하는데 그치곤 하였다. 그런데 통일벼는 한 평에 다섯에서 여섯 근 정도는 수확하게 되어서 일반벼 수확량의 두 배를 웃돌게 되었다. 이렇게 수확량이 많으면서도 논바닥에 떨어지는 낱알들도 많았다. 볏짚도 짧아서 여간한 태풍이나 비바람에는 끄떡도 없었다.
또한 당시 일반벼 볏짚과 달리 연하여 사료로 쓰기에도 좋았다. 반면 밥맛이 좀 떨어진다고 하여 일반미를 선호하기도 했으나 일반 서민들에게는 값이 싸고 양도 많아서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는 그만이었다. 정부에서도 통일벼 모두를 비싼 값에 사들여서 농부들의 소득도 한층 높아졌다. 정부가 통일벼를 모두 사들여 흉년을 대비해 비축하면서 시중에 쌀이 모자랄 때 내놓았기 때문에 '정부미'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통일벼를 개발하여 온 나라와 겨레의 배고픔을 해결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분들의 숭고한 뜻을 기려야 하겠다.
정동찬·국립중앙과학관 시설창조관리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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