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문권 배재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이 이리도 지리멸렬한 일인지 미처 알지 못 했었다. 요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쏟아지는 몰인정한 시선과 의사나 간호사들에게 주어지는 소외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지저귀는 새 소리가 마치 먼 나라에서 전해오는 불길한 내용의 전보만큼이나 아득하다. 나에게 익숙했던 매일 매일이 멀어지기만 하고 나는 이방인이 되어간다. 나는 무기력하고 쉽게 화내고 쉽게 잊어버린다. 나는 타인의 아픔에 귀 기울이지 못한다. 혼자된다는 것이 고통임에도 그것이 고통인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중동호흡기증후군 첫 환자가 발생한지 한 달여가 지난 요즘, 뉴스의 첫 소식은 대부분 숫자로 시작한다. 숫자가 커지는 만큼 실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이 나를 에워싼다. 실체 없는 불안은 몇몇 단어들로 명확해진다. 슈퍼전파자, 감염확진자, 사망자, 격리자, 휴교 등의 단어는 실재하기에 불안감 역시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어느 것에도 명확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 불안이 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불안은 끈덕지다.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어느새 해는 중천이다. 출근해야 한다. 물컹하고 끈덕진 공기를 가로지르며 마스크를 쓴다. 하지만 마스크로도 막을 수 없는 거대한 불안 앞에서는 움츠러든다. 불안은 불안을 먹고 커진다.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불안이 나를 누른다. 출근길이 평소보다 고요하다. 마스크 안에서 도는 습기는 고요함을 배가시킨다.
우리네 일상의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분명 늘어나는 중동호흡기증후군 확진자나, 격리자의 숫자에는 무뎌졌지만, 그래도 세상은 고요하게 변하고 있다. 매일 맞이하던 아침은 다른 표정을 하고 있고, 입을 가린 사람들 사이에 서서 불안이나 공포를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 누구도 나의 불안이나 공포를 해소해 주지 못 할 뿐만 아니라 아무도 나의 아픔에 동의해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그런 것처럼 나의 아픔은 쉽게 소외당할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픔은 실체를 가지지 못하고 흩어질 것이다. 나의 존재마저도 희미해진다. 마스크로 입을 가린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서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다들 비장하다. 입을 가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눈빛이 사뭇 매섭게 느껴진다. 모두가 하나같이 즐거운 표정은 아니다. 더 이상 시간은 쉽게 흐르지 않는다. 어떤 타인이 다른 어떤 타인을 기피하거나 배척한다는 말들이 매일매일 들려온다. 의료진의 자식을 학교에 등교하지 못 하게 했다는 소식, 격리자가 통제에 따르지 않았다는 소식, 경제지표가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 등.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하루하루가 흘러가지만 시간은 멈춘 지 너무 오래인 듯하다.
우리가 염려해야 하는 것은 중동호흡기증후군에 의한 공포보다, 공포에 직면한 우리 사회의 반응이다. 더 이상 타인의 아픔은 아픔이 아니고 나의 그것만이 진정한 아픔이다. 나의 아픔은 절대적이다. 우리는 결코 타인의 아픔을 알 수 없다. 나에게는 별것 아닌 일이 그에게는 목숨을 담보할 정도의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 스스로는 좀 더 잔인해진다. 마스크 위에 빛나는 눈들이 서로를 의심하며 지나간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는 '어리석음은 언제나 악착같은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카뮈의 날카로운 지적이 요즘 우리 사회의 상황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악착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는 어리석음은 끈덕지게 달라붙어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그 결과 관심 대상의 실재에는 무관심하고 어리석음의 결과인 공포만을 바라본다. 악착같은 어리석음을 껴안고 그것이 실재의 삶인 양 살아가는 것이다. 여전히 하늘은 무심하게 맑기만 하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