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호 배재대 총장 |
그러나 로마제국에서 대학교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띤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13년 로마제국 사람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고,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92년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했다. 로마제국에서는 갑자기 국교가 정해지면서 국민들에게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고 설교해야 했다. 그래서 당시 대학교는 이런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중세의 스콜라다. 원래 '여유'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그리스어의 스콜레(Schole)를 라틴어로 소리 나는 대로 적은 단어가 바로 스콜라(schola)이고, 오늘날 '학파' 혹은 '학교'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중세의 스콜라를 우리는 스콜라철학이라고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가르치는 교수는 철학자이고 그 내용은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이후 프랑코왕국의 찰스대제는 8세기부터 스콜라에 일반인 외에 성직자를 위한 과정을 마련했다. 찰스대제의 뜻에 따라 이렇게 스콜라는 세 곳에서 성직자를 길러내었는데, 궁중, 수도원, 그리고 각 교구청이다. 스콜라가 대학교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필요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투자하고 관심을 갖는 찰스대제 이후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대학의 모습은 1096년쯤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이 개교하고 1200년에 파리대가 문을 열었으며, 1386년에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대학교가 개교하면서 현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이 모든 대학교에서는 스콜라와 마찬가지로 철학과 신학을 가르쳤다. 이렇게 유럽의 대학교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양성이 목적이었으며 그 내용은 철학과 신학이지만 가르친 교수는 모두 철학자였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교는 누가 뭐래도 1398년에 세워진 성균관이다.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고 유교교육을 위한 기관으로 설립되었고 이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폐지되었다가 1895년 고종의 명으로 다시 개교해 오늘날 성균관대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그 다음은 광혜원이다. 미국인 선교사 앨런은 고종의 시의로 근무하다가 1885년 2월 25일 고종황제의 허락으로 광혜원을 개원함으로 서양식 병원을 개원했다. 이후 광혜원은 대중을 구한다는 의미의 제중원으로 개칭했고, 이 제중원을 중심으로 다음 해인 1886년 의과대학을 세우니 이것이 연세대학교의 전신이다.
1885년 6월 8일 27살의 미국의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도 역시 고종황제의 명을 받고 서울 정동에 배재학당을 개교하였으며, 다음 해 고종황제는 직접 '인재를 길러내는 집이라는 뜻'이 담겨진 배재학당이란 현판을 교명으로 하사해 오늘에 이르니 이것이 배재대학교의 전신이다. 젊은 아펜젤러는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는 학문'에 중요성을 두고 다른 대학교와 다르게 영어과를 처음 개설했다. 이렇게 우리나라 대학교도 유럽처럼 국가의 필요에 따라 고종황제의 명으로 시작되었지만, 성균관은 1895년부터 유학을, 연세는 1886년부터 의학과를, 그리고 배재는 1885년부터 영어과를 중심으로 교육을 시작했기 때문에 배재학당이 가장 먼저 현대 서양식 교육을 시작했음을 잘 알 수 있다.
현대 서양식 대학교육이 처음에는 인재양성과 지성의 모임으로 출발했지만, 오늘날은 지역사회와 국가가 요구하는 인재양성을 표방하고 있다. 이는 곧 아는 것을 실천할 줄 아는 인재라는 뜻이다. 이런 측면에서 젊은 아펜젤러가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는 학문'을 표방했다는 것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놀란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아펜젤러의 뜻을 고종황제가 인정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허락한 사실에서 대학교를 국가가 필요로 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대학교가 처음부터 그리고 앞으로도 지역사회와 국가의 필요에 의해서 설립되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대학마다 설립취지와 목적이 있다. 시대가 변해도 설립 취지에 근간을 두고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존재가치를 유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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