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언 미래콘텐츠문화연구원장 |
'복면가왕'이라는 한 TV 방송의 예능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글이다. 방송사의 기획 의도에 따르면 '복면가왕'은 이미 획득하고 있는 인기라는 편견을 버리고 진정성 있는 노래로 자신을 어필하는 자가 진정한 가수로 설 수 있는 무대다. 요즘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이 '복면가왕'을 필자도 즐겨 보는데, 예능 프로그램의 가벼움에도 불구하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 우리를 잠시 돌아보게 한다.
이 프로그램은 '부르는 이'가 자신을 숨긴 채 '듣는 이'를 속이려 하고 '듣는 이'가 그런 '부르는 이'를 알아맞히려 하는 단순한 정답 찾기 게임을 넘어선다. 활동한 지 너무 오래돼 대중으로부터 잊어져 가던 자신의 옛 목소리를, 또 그룹에 한데 섞이어 혼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자신만의 음색을 알아주는 판정단에게 여러 출연자들이 고마워했다. 가리면서도 가림 너머의 진짜 자신을 찾아내 주기를 바라는 언뜻 모순적인 기대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80~90년대부터 활동한 가수 권인하, 김종서, 박학기, 장혜진, 이덕진, 조장혁, 진주의 여전한 존재감, 배우, 개그맨, 운동선수로 알려져 있으면서 노래까지 수준급인 박광현, 안재모, 정철규, 신보라, 신수지의 상큼함, 오랜 연륜의 중견가수쯤으로 짐작됐던 25살짜리 배우 김슬기의 깊은 호소력, 복면을 벗을 때까지 여자로만 생각됐던 백청강의 반전, 퍼포먼스에 큰 비중을 두는 탓에 곧잘 구설에 싸이는 남녀 아이돌들의 숨은 노래 실력 들은 호기심이나 놀라움만으로는 설명이 모자란다. 누리꾼들의 요란한 말투를 빌면 '전설' 또는 '소름 돋는 재발견'이다. 그중 가창력 말고 이 프로그램의 취지에 가장 부합하는 주인공은 아마 15년 전 국내 커밍아웃 1호라는 기록을 남긴 홍석천일 것이다. 판정단과 일반 청중 중 복면을 벗기 전까지 그를 알아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듯했다. '철물점 김 사장님'의 이름으로 무대에 올라 선 굵은 목소리로 두 곡의 노래를 부른 뒤 물러난 그는 선입견에 부딪혀 좌절한 수많은 이들 중 자신이 1, 2번째일 것이라며, '듣는 이'들에게 더없이 고소한 웃음과 눈길을 주었다. 유쾌·상쾌·통쾌함에 박장대소한 사람은 정녕 필자만은 아니었으리라.
우리는 흔히 참된 소통을 위해 자신이 쓰고 있는 마스크를 벗어 던지자고 한다. 이는 메타포이므로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 현실에서는 반대로 마스크를 덮어쓰자고 한다. 편견과 고정관념의 극복을 위해서라지만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다. 그 동안 우리는 가면도 쓰지 않은 채 어지간히 뻔뻔했던 모양이다. 정말 우리 사회가 '복면가왕'처럼 얼굴을 가려야만 정직해지고 정의로워질지도 모른다. 만약 '복면'을 썼다면 서로 뒤바뀌었을 일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라 우울하다.
지난 5월 말 한국개발연구원(KDI)의 한 연구는 2010년부터 2012년까지 100개 기업 이사회의 9101개 안건을 분석한 결과를 내놓았다. 여기에는 CEO와 지연·학연이 있는 사외이사의 반대 비율이 지연·학연이 없는 사외이사의 반대 비율보다 낮고, 반대표를 던진 사외이사의 경우도 CEO와 같은 지역 출신 사외이사는 다음해 단 한 명도 교체되지 않은 반면 다른 지역 출신 사외이사는 29%가 교체되었다는 조사 결과가 담겨 있다. 우리 사회의 연줄의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가부장적 온정주의나 폐쇄적 연고주의는 편견과 고정관념을 구조화한다. 만천하에 공개된 채용 제도 속에서도 인물의 역량이 아닌 지연이나 학연과 같은 이리저리 얽히고 설킨 연줄이 절대적이기 일쑤다. 이를 이용하는 것조차 어쩌면 당연시하는 분위기다. '복면가왕'은 '부르는 이'의 가창력과 '듣는 이'의 감동만 있을 뿐 편견과 고정관념은 없다. 중동호흡기증후군 메르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마스크와,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기 위한 마스크! 바야흐로 마스크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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