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노권 목원대 총장 |
그런데 우리는 새로이 유행하는 옷의 변화에 민감한 만큼 다른 변화엔 발맞추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수직적 인간관계의 변화에 대한 요구에 둔감한 것이다. 요즘 들어 신세대의 각종 행태를 두고 전통적인 질서의 해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 보다 높아서, 우려와 한탄, 분노와 체념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가끔 이를 억지로 바로잡아 보려고 하다가 망신을 자초하는 일도 허다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거세게 밀려오는 파도를 홀몸으로 막아서는 것과 같아서, 차라리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만 못하다.
전통과 질서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새에 우리의 의식 속에 형성된 관념일 뿐이다. 그것은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고, 세상과 함께 변화한다. 그런 질서는 일단 형성되면 그 흐름을 갑자기 되돌린 적이 없다. 질서가 무너졌다고 생각하고 그 무너진 질서를 바로잡으려 하는 것은 그 거대한 강물의 흐름을 억지로 바꾸려는 것만큼이나 무모하다. 그것은 이미 사람들의 의식 속에 형성된 생각을 아주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생각이 다 똑같을 순 없다. 세상의 변화를 빨리 감지한 사람들과 더디게 감지한 사람 사이엔 생각에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예전에는 기성세대가 세상의 변화를 제일 먼저 접하는 세대였다. 그래서 그 시대에는 그들이 변화의 주역이었고, 세상의 변화를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젊은 세대들은 어른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수직적 인간관계라고 하는 질서는 그렇게 형성되었다. 요즘은 그 주역이 젊은 세대로 바뀌었다. 따라서 예전의 그 수직적 질서도 바뀌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김용 세계은행 총재는 어느 인터뷰에서 수직적 질서가 우리의 창의성을 얼마나 방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여러 한국의 젊은이를 만나봤는데, 한국 학생들에게 창의성이 없지는 않다. 한국의 시스템에 창의력이 없다. 시스템이 한국 학생들이 목소리 내는 것을 막는다. 내가 25세 때 처음 한국 왔을 때 무조건 '예, 그렇습니다' 하는 것만 배웠다. 나이로 젊은 학생들을 억누르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큰 변화는 어떤 세대가 '우리부터 나이에서 오는 특권을 포기하겠다'고 말할 때 시작될 것이다. 나이와 성(性)에서 오는 특권을 버려야 한다.”
최근 우리의 현실을 볼 때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요즘 자녀수가 적다보니 가정 내에서의 상하관계는 급속히 변화했지만 다른 곳에서는 이 변화를 아직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을 두고 학교는 가정교육 탓을 하고 가정은 학교교육 탓을 한다. 그러나 학생들이 기성의 질서를 따르지 않게 된 것을 가정 탓으로 돌리는 학교는 이미 변화를 멈춘 경우이기 십상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가정이든 학교든 기성세대가 먼저 스스로를 개방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신세대와의 소통이 가능하며, 그들과의 소통을 한 연후에 비로소 갈등 없는 신질서의 태동이 가능하다. 신세대의 가치관을 아예 인정하지 않은 채 무엇인가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한, 두 세대 간의 소통은 물론이고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도 필요한 창의성의 발현을 기대할 수 없다.
학교나 직장은 이미 하나의 가족이다. 영어에서 가족을 의미하는 말인 '패밀리(family)'의 어원을 보면 집안의 '하인이나 노예' 등 '섬기는 자들(servants)'이었다. 부모와 자식은 물론이고, 선생님이나 학생, 사회의 선배나 후배는 모두 서로를 섬기는 자들이어야 한다. 이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다. 지금은 군림이나 억압과 같은 유행지난 옷을 벗어놓고 유행에 맞는 새 옷을 입거나, 적어도 전에 입던 옷이라도 꺼내 입어야 할 시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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