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정열 한남대 문과대학장 |
교통이 발달한 오늘날은 언제라도 백제 문화를 쉽게 즐길 수가 있으며, 지자체의 많은 노력으로 볼거리와 먹거리, 즐길 거리가 풍부해졌고 숙박시설도 완비되었다.
일본인 지인들을 안내할 기회가 많아 공주와 부여는 일 년에도 수차례 방문할 기회를 갖는다. 오전에는 공주에 들러 관람하고 부여까지는 주로 백제큰길을 이용한다. 금강을 따라 달리면서 탁 트인 주변의 경관에 감탄하고, 고대인의 주요 교통로가 하천이었다는 것을 떠올리면서 언젠가는 금강에 백제문화 관광 유람선을 띄워 군산(서천) 앞바다에서 출발하여 부여를 거쳐 공주에 이르는 관광코스가 개발될 것을 상상하기도 한다. 유람선을 타고 백제문화를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 멀지않으리라.
이번 유네스코에 신청한 부여지구의 유적은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백제 나성 등이다. 백제 유적에 대해선 아직도 밝혀내지 못한 것이 많다는 점에 아쉬움을 느끼며 우리들의 관심과 애정이 더욱 모아져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유적 자체가 갖는 역사성과 문화재가 갖는 예술성을 평가 받아 세계유산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유적과 문화재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후손인 우리가 알아야 한다. 즉 우리 생활에서도 백제 문화의 찬란함과 위대함이 유지 계승되어 현재의 삶 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제의 국제성은 서로 존중하는 다문화 국가로, 고품격의 문화는 우리들의 인격에 계승되어야 한다.
부여의 한 중앙에 자리한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경주의 석가탑 다보탑과 함께 삼국시대 대표 석탑이다. 석가탑과 다보탑이 신라문화의 정수라면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문화의 정수다. 빼어난 목탑 기술이 석탑으로 발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땅에는 전란이 많았던 탓에 당시 목조 건축물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특히 백제는 당시 문화재가 원형 보존되어 있는 예가 거의 없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그러한 면에서 중요도가 높다.
오늘날까지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유지 보존된 이유가 무엇일까?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적국의 장수 소정방의 공적비로서 인고의 시절을 견디었다. 자신의 몸에 원수의 기록을 품은 채로 1000여년을 견디어 왔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오랜 세월 공적비라고 불려 왔다. 아픔을 품고 삭이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남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점령자들이 그대로 남겨 둘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백제 유물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인고의 세월을 거치면서도, 지금은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백제문화의 정수를 전해주고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자태는 우아하고 넉넉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비롯하여 잔존하는 백제 유물을 통해, 역사는 우리에게 더욱 멀리 내다보고 계획하고 실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현실의 어려움에 굴하지 말고 미래의 확고한 비전을 위해 더욱 노력해달라고 말이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지금은 시련을 참고 견딜 수 있다고 가르쳐주고 있다. 견디기 어려운 상처를 간직한 채 살아남은 자로서 역사의 엄정성과 함께 미래에 대한 확신의 중요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백제는 개방적인 국제 관계를 유지했으며, 문화수준 역시 높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한 백제문화의 특징에다 포용성과 관용성을 바탕으로 한 미래지향성을 문화적 특징으로하나 더 첨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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