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배재대 총장 |
1848년 2월부터 프랑스를 비롯하여 독일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난다. 이를 역사에서는 유럽의 3대혁명이라고 한다. 모든 혁명에는 원인이 있다. 이 3대혁명의 원인도 여러 가지겠지만 왕과 귀족들은 2년 전부터 지속된 유럽의 가뭄으로 굶주림과 질병으로 분노한 시민들이 일으킨 폭동이라고 폄하시켰다. 가난과 질병 때문에 유럽의 3대 혁명이 일어났다는 원인에 대한 너무 약하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그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가난과 질병에 참다못한 시민들의 분노가 왕과 귀족으로 향했고, 시민들이 원했던 것은 자유라는 것이다.
왜 시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자유를 외치는 것이 가능했을까? 당시 유럽의 많은 왕과 귀족들은 유령을 쫓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유령에 쫓기던 왕과 귀족들은 시민들의 굶주림과 질병에 귀기울일 정신이 없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7년 저서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다. 당시 유럽의 왕과 귀족들은 이 책에 나오는 공산당이라는 유령을 찾아내기 위해서 군대와 경찰 심지어 친위대까지 동원했다. 유령에 매달린 왕과 귀족들은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시민들의 폭동이 혁명으로 이어지자 왕과 귀족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시민들의 편에 서기에 바빴다.
그 결과 프랑스에서는 루이 필리프가 왕좌에서 쫓겨났고,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던 루이 나폴레옹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귀족들의 반대로 나폴레옹은 대통령에 취임하지 못했다. 독일에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서민들에게 새로운 제도와 정치를 마련하겠다고 약속한 다음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독일, 헝가리, 체코를 편입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을 꿈꾸던 메테르니히는 이 혁명으로 결국 쫓겨나고 프란츠 요셉 1세를 황제에 즉위시킨 다음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혁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외적으로 유럽의 3대혁명은 이렇게 모두 시민들의 실패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지난 4월 한 달을 돌아보자. 엘리엇의 시처럼 잔인한 한 달이었다. 유럽의 3대혁명에 시달린 것처럼 온 나라가 성완종 리스트 56자의 유령에 시달린 한 달이었다. 더구나 이 잔인한 달에서 벗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노량대첩의 성웅 이순신 장군의 유령이 살아 있는 왜군을 쫓은 것에 비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죽은 제갈량이 살아 있는 중달 사마의를 쫓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예로 들기도 한다.
이런 모든 얘기들은 각자 자기 일을 하지 못하고 성완종 리스트에만 매달려 지낸 지난 한 달을 돌아보며 하는 각성의 소리고 볼멘소리다. 국회는 회기 중에 꼭 처리해야 할 민생법안을 뒤로 미루고 또다시 다음 회기를 기약해야 한다. 행정은 인사검증시스템과 새로운 인사 선발이라는 문제를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 가장 눈과 귀가 쏠리는 곳은 역시 사법이다. 사법은 항상 법이 정한 범위 내에서 철저하게 모든 것을 밝히고 처리해 왔지만, 이번에는 특히나 더 많은 눈과 귀들이 사법은 바라보고 기울이고 있다. 이 점을 감안한다면 사법이 느끼는 중압감은 다른 어느 때보다 더 무거울 것이다.
19세기 유럽의 왕과 귀족은 시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모든 공권력을 풀어 공산당이라는 보이지 않는 유령을 잡기 위해 애써다 결국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빠졌다. 지난 한 달 우리 모두도 같은 것을 경험했는지도 모른다. 잔인한 달 4월은 지나고 계절의 여왕 5월이 왔다. 국민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보이지 않은 것과의 싸움은 사법적 판단과 처리에 맡기고,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매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닐까?
김영호 배재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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