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석 전민초 교장 |
'무슨 일로 방문을 했을까?' 그러잖아도 세월호 사건으로 온통나라가 애잔한 분위기인데….
'선생님, 저… 30년 전… 알아보시겠어요?'
시간은 오후 4시쯤, 이 시간이면 한낮인데 방문객은 낮술 때문인지 몸을 자주 뒤척이기도 하고 히죽히죽 웃으며 밉지 않게 이야기 할 때마다 술내가 햇살을 타고 금세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방문객은 엉엉 울다 웃다 수줍은 듯 고개를 떨구기도 하고,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기도 하면서 지난 세월 변해버린 선생님의 모습을 확인이라도 하듯 빤히 쳐다보기도 했다.
큰 덩치인 방문객의 행동을 보면서 30년 전 6학년 때 판박이 하듯 회상되는 아이가 떠올랐다. 학교 앞이 집이라 괜찮다며 늦게까지 화분에 물도 주고, 교실 정리도 하면서 늘 책을 즐겨 읽던 그 아이의 모습이 확연이 드러나 이름을 불러주며 방문객을 꼭 끌어 안았다.
선생님을 찾은 이유는 이러했다. 그동안 참 열심히 살았단다. 질곡(桎梏)의 험난함도 있었지만 잘 견뎌내고 지금은 작지만 몫이 괜찮은 곳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아이의 성격을 짐작하건데 그 식당은 분명 친절하고 음식 맛도 좋을 뿐더러 특히 청결해서 늘 손님들로 가득찰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했다.
7년 전쯤 결혼해서 아내와 열심히 살았는데 어떤 이유였는지 아내에게 우울증이 생겼단다. 남편의 정성과 치료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갑자기 삶을 포기 했다. 엊그제 삼우제를 지내고 삶의 여정이 너무 혹독한 것 같아 누굴 찾나 싶었는데 30년 전 담임선생님이 그리도 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소주 한잔하고 용기를 내 찾아뵈었으니 용서해 달라며 또 다시 웃다 울다를 반복했다.
엊그제 상처했다는 회한 섞인 눈물위로 너무 밝게 비친 4월 햇살이 참 야속해 보였다. 산만한 등을 쓸어 주며 한 없이 울게 내버려 두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선생님, 모든 게 생생해요. 30년 전의 일들이….' 옛 얘기를 쏟아 놓으면 속이라도 시원 해 지려나 싶어 오랜 시간 들어 주었다.
여름방학 때 선생님 집을 방문했던 일, 사모님에 대한 이야기… 눈 내리는 날 목청껏 불렀던 '창밖을 보라, 흰 눈이 내린다~' 지금도 겨울이 되면 그 시절이 간절하다는 얘기, 중학교 원서를 쓰고 지원자 도장을 찍어야 했는데 도장이 없는 친구들에게 선생님이 일일이 지우개로 도장을 만들어 찍어주셨다는 얘기 등. 어제 일처럼 30년 전 이야기를 너무도 생생하게 쏟아 놓았다. 갑자기 한바탕 웃더니 가겠다며 일어섰고 교문 밖까지 배웅해 주었다. 오늘은 누에고치처럼 아픔을 품었지만 그 아픔이 내일은 오색 면사(綿絲)로 탄생 되 길 기원해 줬다.
아직은 이른데 벌써 반바지 차림을 하고 아침 놀이에 푹 빠진 아이들을 보면서 겸연쩍은 자문(自問)을 던진다. '다름을 인정해 주고 꿈을 가꾸어 갈 수 있게 다양한 기회와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는지?' '아이들에게 너무 성급하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지?' '사랑을 갖고 기다릴 줄 아는 느긋함과 한 발짝 다가서거나 두 발짝 물러서서 여유를 갖고 바라보고는 있는지?'
지난 40년간 하늘의 인연으로 만났던 아이들 모습을 그려본다. 쉽게 내 던진 무수한 말들, 거리낌 없이 드러낸 표정과 해동, 비교의 대상이나 판단의 잣대가 나무꾼의 갈퀴질에 패어 나간 산자락의 상처처럼 아직도 그 마음으로 날 기억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4월의 내 모습은 어떨까? 자화상(自畵像)을 들여다 본다.
어느 직업이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사람을 교육한다는 직업은 참 무섭고 두려운 직업이다. 항상 흰 눈 내린 이른 새벽 첫 발자국을 내딛는 마음으로 조심 또 조심스럽기만 한 직업이다.
김영석 전민초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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