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형 대덕대 교수 |
사실을 알려야 하는 보도의 의무 때문인가, 국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함인가. 잘못된 점의 폐해를 알려 재발을 막고, 나아가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선의의 종소리인가. 종을 치면 내가 알려지고, 세게 칠수록 더 알려진다는 착각에 이목을 끌려고 종을 치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마치 마약에 취하듯, 종치는 쾌감에 중독되어 습관적으로 치는 것은 아닌가. '나' 때문에 울리는 종이 아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혹시 강 너머 불구경하는 심정으로 치고 듣는 것은 아닌가.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지만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자기 합리화의 종을 치는 것은 아닌가. 숱한 종소리에 길들여지고 둔감해져 관심이 적어지면서도, 색다른 종소리를 은근히 기대하며 귀를 살며시 기울이는 것은 '나'만의 일인가.
종은 뉴스를 통해서만 울리는 것은 아니다. '공부하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듣는 소리, 가정에서 듣는 각종 잔소리, 상사로부터의 '일 좀 제대로 하라'는 소리, 갑의 온갖 주문 소리, 심지어 혼자 소주 한잔 마시고 싶은 포장마차에서 술에 취해 세상을 한탄하는 모르는 옆 사람의 푸념 소리, 그리고 정말로 듣고 싶은 성당과 교회와 절에서 조용히 울리는 기도소리. 천지사방에서 울리는 그 많고 다양한 종은 과연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 것일까.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말하고, 누구를 위하여 행동(일)하며,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살아가는가.
종소리는 과거 시계가 귀하던 시절, 하루의 시작과 마침 그리고 마을의 대소사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다. 황혼녘 전원에서 종소리를 들으며 삼종기도를 올리는 장면을 그린 밀레의 '만종'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스폐인 내전을 소재로 한 헤밍웨이의 소설이자, 영화의 고전으로도 유명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17세기 영국 성공회 성직자인 존 던 신부가 쓴 시에서 유래한다. 그가 언급한 종은 마을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조종(弔鐘)으로서,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내가 슬퍼해야 할 만큼 모든 인류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고 있다. 헤밍웨이 소설에서의 주인공인 미국인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누구를 위해 종을 울렸는가. 가정과 직장에서 나와 직접 관련된 종소리는 물론, 사건·사고·비리 등을 알리는 모든 종소리들은 마치 나비효과처럼 나와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섣부르게 함부로 종을 치지 말자. 더더욱 남을 비방하고 해를 가하여 그의 눈에 눈물을 흐르게 하는 종을 치지 말자. 무심코 재미로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 잘하고 본받고 개선할 점, 대안 있는 선의의 비판, 그리고 건강하고 건전한 사회를 위하고 알리는 종을 치자. '나'를 위함보다, '남'의 잘됨을 위해 종을 치자. 모든 종소리에 내가 관련되어 있고, 좋고 나쁜 것 모두 내게 귀결되기에, 누워서 침 뱉지 말자. 아이를 혼냄은 내가 못나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부하를 질타함은 내가 부족해서이며, 도처에서 발생하는 사건·사고는 내가 어디선가 법을 위반했기 때문이며, 부패와 비리의 책임은 이 사회에 구성원인 나에게도 있는 것이다. '누구를 위하여 조종이 울리는지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나니'라는 존 던 신부의 말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질타하는 종을 친다. 모든 종은 '나'를 위하여 그리고 '나' 때문에 울리는 것이기에, 소리 냄에 좀 더 진중해지고, 소리 들음에 좀 더 겸허해져야겠다. 그러면서 매사에 감사하는 종소리와 더 나은 내일이 있다는 희망의 종소리가 은은하고도 넓게 퍼지는 세상을 그리며, 찌푸린 얼굴을 잠시 펴본다.
이하형 대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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