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일 한국전쟁시 민간인 희생이 있었던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발굴 중단 후 흙 되메우기를 하고 있다. |
민간인 집단희생에 대해 대전 영렬탑은 전시관에 관련 사진 두 장을 전시한 게 전부이고, 동구 산내 골령골이나 대전형무소 우물터에는 공공기관의 안내 팻말조차 없는 실정이다.
6·25전쟁 목격 주민에 따르면 1950년 7월 20일 오전 10시쯤 대전 유성구 계산동 사기막골에 미군 전투기 4대가 떠올랐다. 앞서 9시쯤 정찰기 한 대가 마을을 훑고 간 후 전투기가 나타나자 주민들은 아군으로 이해하고 비행기에서 잘 보이는 언덕에 모여 손을 흔들어 민간인임을 알리려 했다.
그러나 해당 전투기는 기대와 달리 아랫마을 흰옷을 입은 이들을 향해 기관총에 불을 뿜으며 기총소사를 벌였다.
2일 만난 이용철(85·유성 계산1통)씨는 “호적기(전투기)가 나타나니 마을 큰어른이 양지바른 언덕에 모여 손을 흔들라고 하셨지. 그때 저 아랫마을 버드나무 밑에는 피난민들이 햇볕을 가린다고 파란 포장을 나뭇가지에 걸어놨는데 전투기가 거기를 폭격했어. 호적기가 수차례 오가며 '드르륵'하더니 우리 발밑으로 손바닥만한 총알 껍데기가 떨어졌고 느티나무에 있던 많은 피난민이 죽고 다치고 집도 불탔지. 지금은 그때를 본 사람이 몇 안 남았어”라고 기억했다.
그릇을 굽는 가마터가 있어 '사기막골'이라고 불렸던 마을 주민과 피란민이 희생됐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8년 사기막골사건 조사 과정에서 1950년 7월 20일자 미군 제8전폭비행단의 임무보고서를 통해 “당일 F-80전투기 4대가 유성 남쪽 3~4마일 지점에서 지프 1대와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기총공격했다”는 기록을 확인했다.
하지만 “미군 폭격이 대전을 두고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한 것으로 흰 옷 입은 사람들에 대한 공격명령을 내린 통제관의 고의 과실을 논증할 수 없다”며 진실규명 불능으로 종결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은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만 남아 있고 당시를 증언할 수 있는 사람도 이씨가 거의 유일하다.
대전 민간인 희생은 인민군이 대전에서 철수할 때 대전형무소와 프란치스코 수도원, 대전경찰서에서 또다시 반복됐다. 인민군은 철수 직전인 9월 25일부터 26일 새벽 사이 우익인사 최소 1557명을 집단 학살해 형무소 밭고랑과 취사장 우물, 용두동과 도마동의 야산, 탄방지역에 매장했다. 이같은 역사는 옛 대전형무소에 망루 안내문과 영렬탑 전시실에 글과 사진으로 간략히 안내됐고, 희생자 규모 역시 진실화해위 결정문과 시역사박물관이 다르게 안내한다.
군과 경찰 등에 의해 재소자 최소 1800명이 학살된 동구 골령골은 유해조차 제대로 발굴하지 못한 채 2일 흙을 되메웠다.
대전충남인권연대 이상재 사무국장은 “전쟁때 민간인 희생은 좋든 싫든 우리의 역사이고 정확히 밝혀 기록으로 남기는 게 전후세대가 지닌 책임”이라고 말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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