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광장]누룽지와 숭늉의 말을 듣고

  • 오피니언
  • 여론광장

[여론광장]누룽지와 숭늉의 말을 듣고

박상언 문화평론가

  • 승인 2015-02-24 13:46
  • 신문게재 2015-02-25 19면
  • 박상언 문화평론가박상언 문화평론가
▲박상언 문화평론가
▲박상언 문화평론가
나는 누룽지다. 쌀과 물을 한데 섞어 끓이면 쌀이 익어 밥이 된다. 이때 솥 밑바닥과 언저리에 노릇하게 눌어붙는 게 누룽지다. 쌀이 차진 밥으로 바뀌려면 뜸이 들어야 한다. 이 뜸 드는 과정에서 내가 태어난다. 쌀의 양분이 아래로 몰리면서 몇몇 반응이 일어나니, 그 구수한 맛도 맛이려니와 사람 몸엔들 또 얼마나 이롭겠는가. 어쩌면 처음 나는 밥의 양만 줄이는 애물이었는지 모르지만 나의 맛과 효용이 이내 알려진 것이었으리라.

그렇게 천 년을 살아온 내가 1965년 일본에서 전기보온밥솥이 발명되고 이듬해 우리나라도 생산하자 운명의 뒤안길에 섰다. 아예 내가 생기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바쁜 세상에서 간편한 밥 짓기의 필요성이야 얼마든 인정하겠는데, 그 맛과 효용마저 아랑곳하지 않은 까닭은 왜일까. 게다가 뜸이라는 은근한 기다림 속에 밴 나의 뜻마저 버려졌다. “하늘 천, 따 지, 가마솥에 누룽지, 박박 긁어서….” 옛날 어린 학동들의 글공부를 즐겁게 하던 추억은 또 어떻고.

그 시절이 그리워서는 아니겠으나 언제부턴가 나는 차츰 부활하고 있다. 나를 넣은 여러 조리법이 개발되고, 산이나 낚시터 같은 데서도 먹게끔 그야말로 '간편'하게 만들어진다. 나를 만드는 전기밥솥, 압력밥솥, 기구도 나왔다. 또 찜이나 탕의 남은 양념과 국물에 밥을 비비면서 일부러 눌리기도 하는데, 그것도 나다. 꼬들꼬들한 식감 때문임을 내 모르는 바 아니며, 그 짧은 기다림이 옛날의 기다림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도 안다. 나의 아들은 숭늉이다.

나는 숭늉이다. 어머니인 누룽지가 다시 물과 함께 한소끔 끓으면 내가 된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와 분리될 수 없다. 어머니는 내게 당신의 피와 살을 최대로 녹여주시고는 낮게 갈앉아 계시다 사람들의 모자란 배를 다시 채워주신다. 어머니의 구수함은 나에게로 와 부드러운 약(藥)으로 완성된다. 유식한 말로 자랑하면, 소화 촉진, 항산화, 항암, 지방 분해, 숙취 해소의 효과를 줌은 물론 당뇨, 비만, 뇌혈관 질환의 예방에 이바지한다.

내 이름 '숭늉'은 한자말 '숙랭(熟冷)'에서 왔다. 이 숙랭은 원래 '숙랭수(熟冷水)'로서 '찬물을 익히다' 또는 '익힌 찬물'을 말한다. 나에 대한 옛 기록은 여럿인데, 12세기 '계림유사'(손목), '고려도경'(서긍), 그리고 17세기 '동의보감'(허준), 18세기 '노가재연행일기'(김창업) 등이 그것들이다. 특히 '동의보감'에는 취건반(炊乾飯)을 끓여 약으로 썼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취건반이 바로 우리 어머니 누룽지다.

음식을 목구멍으로 잘 넘기지 못하거나 넘긴다 해도 위에까지 이르지 못한 채 토하는 열격에는 한 해 묵은 취건반을 여울물로 달여 으깬 뒤 즙으로 먹이고, 그렇게 해서 밥을 먹을 수 있게 되면 본격적으로 약을 쓴다고 하였던 것이다. 열격은 위암, 식도암, 식도 협착이나 경련 따위를 이른다. 짜고 매운 음식으로 산성화한 맛을 입가심하게 하면서 더부룩한 속까지 개운하게 해주는 것이 나의 본디 역할이다.

100여 년 전부터 서양과 근대를 상징하는 커피에 밀리던 나와, 나의 어머니 누룽지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러나 내 어머니와 나의 가치는 겉으로 드러나는 맛과 효용에만 있지 않다.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다'는 역설적 속담처럼 모든 일에는 순서와 질서가 있고, 그 순서와 질서는 기다림의 미학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의 구수함과 약성도 좋지만 우리를 있게 한 '뜸'에도 주목해주길 바란다. 그 뜸이 바로 문화다.

누룽지와 숭늉의 말을 듣고 필자는 스스로를 돌아본다. 단기적이고도 가시적인 결과만을 첫째로 치는 우리와 우리 사회의 얄팍함이 새삼 허허롭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었거나 찬밥을 억지로 눌린 누룽지보다는 솥이나 냄비에서 밥뜸을 들일 때 자연스레 생기는 누룽지와, 그 끓인 숭늉을 가끔씩은 잡숫고 싶지 않으신가. 자녀들과 함께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우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들이여, 누룽지와 숭늉의 참뜻을 새길지어다.

박상언 문화평론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세종시 50대 공직자 잇따라 실신...연말 과로 추정
  2. [현장취재]한남대 재경동문회 송년의밤
  3. 대전시주민자치회와 제천시 주민자치위원장협의회 자매결연 업무협약식
  4. 조원휘 대전시의회 의장 "대전.충남 통합으로 세계 도약을"
  5. 천안시의회 김영한 의원, '천안시 국가유공자 등 우선주차구역 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안' 상임위 통과
  1. [취임 100일 인터뷰] 황창선 대전경찰청장 "대전도 경무관급 서장 필요…신종범죄 강력 대응할 것"
  2. [사설] 아산만 순환철도, ‘베이밸리 메가시티’ 청신호 켜졌다
  3. [사설] 충남대 '글로컬대 도전 전략' 치밀해야
  4. 대전중부서, 자율방범연합대 범죄예방 한마음 전진대회 개최
  5. 대전시노인복지관협회 종사자 역량강화 워크숍

헤드라인 뉴스


영정그림 속 미소 띤 환이… “같은 슬픔 반복되지 않길”

영정그림 속 미소 띤 환이… “같은 슬픔 반복되지 않길”

"환이야, 많이 아팠지. 네가 떠나는 금요일, 마침 우리를 만나고서 작별했지. 이별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 노력할게. -환이를 사랑하는 선생님들이" 21일 대전 서구 괴곡동 대전시립 추모공원에 작별의 편지를 읽는 낮은 목소리가 말 없는 무덤을 맴돌았다. 시립묘지 안에 정성스럽게 키운 향나무 아래에 방임과 학대 속에 고통을 겪은 '환이(가명)'는 그렇게 안장됐다. 2022년 11월 친모의 학대로 의식을 잃은 채 구조된 환이는 충남대병원 소아 중환자실에서 24개월을 치료에 응했고, 외롭지 않았다. 간호사와 의사 선생님이 24시간 환..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22일 대전에서 열린 환경부의 금강권역 하천유역 수자원관리계획 공청회가 환경단체와 청양 주민들의 강한 반발 속에 개최 2시간 만에 종료됐다. 환경부는 이날 오후 2시부터 대전컨벤션센터(DCC)에서 공청회를 개최했다. 환경단체와 청양 지천댐을 반대하는 시민들은 공청회 개최 전부터 단상에 가까운 앞좌석에 앉아 '꼼수로 신규댐 건설을 획책하는 졸속 공청회 반대한다' 등의 피켓 시위를 벌였다. 이에 경찰은 경찰력을 투입해 공청회와 토론이 진행될 단상 앞을 지켰다. 서해엽 환경부 수자원개발과장 "정상적인 공청회 진행을 위해 정숙해달라"며 마..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