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한남대 총장 |
당대 경제정책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균역법의 시행이었다. 양인들이 국방의무 대신 세금으로 내던 포목을 2필에서 1필로 줄여서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요즘 연말정산으로 들끓는 조세저항과 국민 불만에 관해 참고할 만하다. 1725년부터 각 도에 방죽을 구축하여 가뭄 피해에 대비했고, 1729년엔 궁궐에 속한 전답과 병영의 둔전에도 정해진 양 이상을 소비할 땐 세금을 부담시켰다. 한편 다섯 집을 한 통으로 묶는 마을의 최소단위 오가작통법과 마을의 책임자가 관할구역의 사건ㆍ사고와 인적변화를 신고케 하는 이정의 법을 엄격히 지키게 해 탈세를 원천봉쇄했다.
이 밖에도, 영조는 각 도에 보고되지 않은 은결을 면밀히 조사케 하고 애초에 국가 비축미로 빈농을 구제하기 위해 마련한 환곡의 목적 외 사용을 시정했다. 1763년엔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오자 흉년에 백성을 위한 구황식량으로 활용했다.
사회정책으로는 신분에 따라 국가에 대한 의무사항을 다르게했다. 양인들에겐 균역법을, 천민들에겐 공사천법을 마련해 모든 국민이 평등한 의무를 분담케 했다. 또한 양인의 숫자를 늘렸고 서얼 차별을 없애 서얼 출신도 관리로 등용했다. 오늘날의 신분관리와 다문화가정의 처우에 참고할 만하다.
국방정책을 보면 1725년 군사무기를 만들게 했으며, 1729년에는 김만기가 만든 화차를 개량했고 이듬해엔 수어청에다 조총을 제작케 했다. 그리고 전라 좌수사 전운상이 제조한 해골선을 통영 및 각 도의 수영에 배치시켜 해군력을 한층 더 보강했다. 이 같은 국방정책을 변방에도 적용해 요새 구축을 늘리고, 1727년엔 북관군병에도 총을 나눠줘 훈련시켰으며, 평양 중성을 구축하게했다. 1743년엔 강화도의 외성 개축작업을 착수해 다음 해에 완성했다.
국정 전반에 걸쳐 시도한 이런 변화 외에 문화적인 성과도 많이 있다. 영조 자신이 학문을 즐겼기 때문에 스스로 서적을 찬술했고, 인쇄술을 개량해 많은 서적을 간행해 민간에 반포함으로 일반 백성들도 볼 수 있게 했다.
1729년에 '감란록', 1730년에 '숙묘보감', 1732년에 이황의 학문 세계를 정리한 '퇴도언행록'을 간행했다. '경국대전'을 보강했고, 여성들을 위해 네 권을 한데 묶은 '여사서'도 간행했으며 '천문도', '오충륜도', '양역실총' 등을 발행했다. 관리들의 필독서인 '무원록'은 행정매뉴얼이 됐고, 1770년엔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동국문헌비고'도 발행했다. 영조 자신이 '악학궤범서문'을 비롯해 자서전인 '어제자성편', 무신들을 위한 '위장필람' 등 10여 권의 저서를 냈다. 이 시기에 재야에서는 실학이 확대되면서 북학파 홍대용의 '연행록', 유형원의 '반계수록', 신경준의 '도로고' 등이 편찬됐다.
최근에 국정의 혼란과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 하락, 각 정당의 당 대표와 원내대표 교체로 인한 불안정, 서민들의 경제난과 팍팍한 살림살이, 국방지도자들의 탈선비리 적발과 병영 내 성 군기 문란사고, 대졸 청년들의 실업문제, 초 저출산, 초 고령화로 인한 불길한 미래예측 등이 실타래같이 얽혀서 국민 불안이 가중되고 있으니, 우리 모두 옛 군주들의 통치 기록과 업적을 되짚어보면서 오늘을 살며 내일을 준비하는 지혜를 다시 한 번 배워야겠다.
김형태 한남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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