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언 대전문화재단 대표이사 |
옛날 정선 고을에, 어질고 정직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고 손님 접대 잘하고 놀기를 즐겨하는 한 양반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 가난하여 관가에서 내주는 환곡을 타 먹으며 사는 처지였다. 차츰 빚이 쌓여 천 석이나 되었어도 어쩔 길이 없었다. 관찰사의 투옥 명령이 떨어졌으나, 정선 군수는 그를 옥에 가둘 수도 빚을 갚게 할 수도 없었다. 양반의 아내는 “양반(兩半)은 커녕 한 푼어치도 안 되는구려!” 하고 양반(兩班)을 질타하였다.(여기서 '兩半'은 '한 냥 반'이라는 뜻으로서 '兩班'과 발음이 같다.)
이를 안 이웃의 천부(賤富)가 양반의 신분을 사는 대신 빚을 갚아주었다. 한숨 돌린 군수가 천부에게 양반문서를 만들어 주는데, 처음에는 양반이 취할 형식적인 행동거지들을 늘어놓는다. 양반이 좋은 것인 줄 알았던 천부는 행동만을 구속하는 것 말고 다른 좋은 일도 있게 해 달라고 한다. 이에 군수가 다시 작성한 문서에는 양반의 비리와 전횡, 무능과 위선이 하나하나 열거된다. 그러자 천부는 “그만 두시오. 장차 나를 도둑놈으로 만들 작정이오?” 하고는 다시는 양반을 입에조차 올리지 않았다.
이야기 둘.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자, 이를 틈타 환관 조고가 권력을 농락한다. 조고는 진시황이 후사로 지명한 맏아들 부소를 계략으로써 죽이고, 그 동생인 호해를 2세 황제로 옹립한다. 승상 이사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은 조고는 스스로 황제가 되기 위한 야심을 품고, 자신이 세운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든다.
어느 날 조고가 어전에 사슴을 끌어다 놓고는 황제 호해에게 아뢴다. “말을 바치나이다.” 이에 황제는 웃으면서 “괴이한 소리구나. 어찌 사슴을 말이라 하는가? 이게 사슴이오, 말이오?”라고 묻는다. 조고의 위세에 떨고 있던 신하들은 대부분 잠자코 있거나 말이라고 한다. 사슴이라고 답한 이들이 조고의 모략에 죽임을 당하자, 그 뒤로는 조고의 말에 이의를 다는 자가 없었다.
결국 정사에서 손을 떼게 된 황제 호해마저 죽인 조고는 다시 부소의 아들 자영을 3세 황제로 삼는다. 2세 황제 호해의 꼴이 될 것을 두려워한 자영은 두 아들과 함께 계책을 세운 뒤 한담으로 하여금 조고를 죽이도록 이른다. 한담의 칼에 찔려 죽어가는 조고에게 자영이 호통을 친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자영은 조고의 삼족을 멸하고 그의 목을 함양의 저잣거리에 효수한다.
2014년 한 해가 저물 무렵, 두 이야기가 떠올랐다. 앞엣것은 연암 박지원 문학의 압권이자 해학과 풍자의 정채(精彩)가 가득한 '양반전'이며, 뒤엣것은 교수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유래와 전말이다. 큰 사건 사고가 유독 많은 올해, '세월호 참사'와 '땅콩 회항'은 대표적인 것들. 지금 우리 사회는 18세기 '양반전'의 무대보다 더 아수라인 듯하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면서 황제를 쥐락펴락한 2200여 년 전의 조고가 이 시대에도 한둘이 아닐 것이다.
순리(順理)가 역리(逆理)에 내몰리니 역리를 순리라 한다. 순리가 맥을 못 추니 역리가 활개를 친다. 이제 순리는 삶 속에 없고 바랜 책장에만 있는가. 부디 새해에는 동해 바닷물에 말끔하게 씻긴 '새 해'가 떠오르길 바란다.
부당한 힘에 정의가 쓰러지지 않고, 정치놀음에 원칙이 무너지지 않는 새 해, 역리의 헌 해가 아닌 순리의 새해! 탈이라도 뒤집어쓰고 악귀들을 물리치렷다. 비리와 전횡, 무능과 위선의 짓거리들을 놀려대는 말뚝이가 되렷다.
바람 따라 물 따라 모든 게 순해야 할 한 해의 저물 녘에 이토록 마음에 날이 서고 켕기는 까닭은 어인 일일꼬? 어디 필자뿐이랴. 정말, 탈춤이나 한바탕 질펀하게 추어 볼까나. 얼쑤!
박상언 대전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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