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균 용운초 교장 |
그랬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가뭄의 논바닥처럼, 거북이 등짝처럼 쩍쩍 갈라진 소년의 팔뚝은 안티프라민으로 도배하고 붕대로 칭칭 동여맸다. 그리고는 또 다시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다. 그것도 흙모래 맨땅 위에서 말이다. 몸을 날리는 슬라이딩과 롤링을 그때 배웠다. 숨통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순간에도 실전상황을 그리며 고통을 참았다. “싸잇아웃, 싸잇아웃”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순간의 함성들이 지금도 귓전을 맴돈다. 그렇게 혹독한 훈련에도 우리는 번번이 깨졌다. 그 때마다 코치선생님에게 몽둥이로 엉덩이를 두둘겨 맞았다. 어린 가슴에도 아픈 것 보다 승패의 아쉬움과 분함, 억울함으로 더 울었다. 바로 대천한내국민학교 창단팀 배구시절 이야기다.
아침에 학교에 가면 공부는 거의 하지 않고 배구만 가르쳤던, 지금 생각하면 잘 이해가지 않는 학교생활이었기에 어떻게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그런 선수생활을 시켰을까 궁금했었다. 그런데 가만히 더듬어 생각해 보니 수긍이 갔다. 어린시절 시합당일 운동장에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사이로 어머니의 돋보이는 열렬한 응원을 보았다. 그리고 내가 어른이 된 때에도 어머니는 배구장을 찾아와 부끄러움도 잊은 채 광적인 응원을 펼쳐, '도대체 저분이 누구냐' 주위사람들을 궁금케 했다. “점심시간에 밥도 안 먹고 배구했다”는 학창시절 이야기, TV를 보다가도 배구장면만 나오면 탄성과 환호로 집이 들썩 들썩했던 모습들을 종합해 볼 때 우리 어머니는 확실한 배구 마니아셨다.
그 DNA가 어디 갔겠는가. 26년전 대전태평초등학교 필자의 배구스토리는 유명하다. 동생결혼식에 안가고 배구대회에 참석한 사건이다. 하지만 그것도 알고 보면 우리 부모님의 각별한 배구사랑이 원인이었다. 당시 체육부장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이 집에 찾아와 부모님을 알현하고 단체로 감사의 큰절을 드리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그 배구도 기적처럼 우승했다.
당시 교직원 배구시합은 지금상황과는 무척 달랐다. 대전권 거의 모든 초등학교가 참여했고 아침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한 운동장에서 토너먼트로 진행되었다. 32강, 16강, 8강, 4강, 결승전까지 가는 팀의 선수들은 초죽음이 되곤 했다. 한번은 허벅지의 모세혈관, 실핏줄, 이런 것들이 모두 터졌는지, 파란 잉크를 엎지른 것처럼 허벅지가 몇 달 동안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그 뿐인가. 해마다 엄지발톱 하나씩은 꼭 빠졌다. 전위세터의 수난이다. 상대편한테 밟히고, 밟히고, 또 밟히다보면 그 발톱은 서서히 죽어 가는데 어느 날 목욕탕에서 그 새까만 엄지발톱은 영락없는 게딱지모습으로 벌러덩 문안을 드렸다. 죽은 발톱 밑으로 어느새 새 발톱은 잘 자라고 있었다. 필자는 배구선수로서 키가 작아 점프력을 키우기 위해 집 처마에 공을 매달아 놓고 점프훈련을 매일 했다. 하루에 100번씩 찍었다. 한 시간 이상 지속됐다. 숨통이 끊어질 듯 고통스런 순간마다 '이건 결승전이다', '듀스상황이다' 스스로 최면을 걸면서 그렇게 무섭게 연습했다.
배구정신, 필자의 배구정신은 최선이다. 그 한복판에 건강과 젊음, 행복이 있다. 최근 대전용운초등학교는 여러 차례 우승을 했다. '배구로 행복이 꽃피는 학교'라 했다. 용운 선생님들의 자긍심은 하늘을 찌를 듯하다. 선생님들의 행복을 어린이들에게 나누자 했다. 오늘따라 거울에 비친 내 터진 입술 상처가 더욱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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