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로 한밭대 교수 |
전문가들의 얘기를 정리하면 통일의 방법에는 3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남북한이 협상을 통해 통일을 하는 것이고, 둘째는 무력에 의한 통합이며, 셋째는 북한의 자연적 몰락에 의한 통일이 있을 수 있다.
남한과 북한은 1991년 동시에 UN에 가입되어 국제법상 남북한은 독립국이므로 UN결의에 따르지 않는 무력에 의한 통일은 불가능하다. 다만, 북한이 국제법을 어겨서 UN의 무력제제를 받아 붕괴될 경우 새로운 상황을 맞을 수는 있다. 첫번째의 남북협상에 의한 통일도 기대하기 어렵다. 7·4남북공동성명을 통해 통일의 3원칙을 합의하였으나 남북은 화해협력을 기초로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기로 합의하는 수준이었고, '남북 화해와 협력 및 교류·협력에 관한 기본 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이 채택됨으로써 평화체제를 구축하였다. 평화체제가 한국의 번영에 도움이 되었지만 통일의 절박성을 반감시킨 영향도 있었다고 보여진다. 합의제 통일은 북한의 통일노선인 '선 남조선 혁명 후 공산화 통일'이 바뀌지 않는 한, 김정은 정권과 그 측근들의 권력욕이 사라지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세번째 통일방안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도 만만치 않다. 국제법상 북한이 붕괴되어도 UN의 동의없이 한발짝도 북한에 들어갈 수 없다. 북한 붕괴 후 들어서는 과도정부가 누구와 손을 잡느냐에 달려있다. 통일의 길을 선택하면 과도정부와 한국정부가 협의하여 통일헌법을 만들고 절차에 따라 통일국가를 만들 수 있지만 독립국가로 남을 가능성도 있고, 친중국 성향을 더 강화할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이 한반도 통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있다. 주변 강대국들은 우리에게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겉으로는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을 환영하고 한반도의 긴장완화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속으로는 새로운 역학 구도형성으로 인해 자국의 국익이 어떻게 영향을 받을까 부심하고 있다.
독일 통일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서독과의 경제격차가 커지고 동독주민의 생계가 위협받으면서 급속도로 민심이 이반되었고, 1989년 5월 지방선거의 부정으로 인해 저항세력이 조직화되기 시작하여 1989년 초여름부터 라이프치히에서 수백 명이 여행의 자유 등 개혁을 요구하며 월요시위를 시작했다. 또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이후 주요 분야의 인력들이 서독으로 이주함으로써 동독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되었다. 헬무트 콜 총리는 1989년 11월 28일 <조약공동체→국가연합적 구조→연방식 통일국가>를 이룩하기 위한 10단계 통일방안을 제시하였고, 1989년 드레스덴에서 열린 양 독일 정상 간 회담에서 1990년 4월까지 조약 공동체를 형성하기로 합의하여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독일은 우리와 달리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을 겪지 않았고 강대국의 직접적 간섭도 적었다. 동·서독은 UN에 동시 가입하여 1980년대 초부터 직접적인 교류를 시작했기 때문에 개혁과 자유화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서독은 연간 6000억원을 동독에 지원하여 서독에 대한 친근감을 유지하는 등 많은 준비를 해 왔다.
우리도 통일준비를 해야 한다. 첫째, 어떤 경우에든 북한주민들에도 이득이 되는 통일방안이 준비되어야 한다. 독립국가로서 북측이 원하지 않는 통일은 어렵다. 한민족으로서 민족 동질성을 회복하고, 통일에 대한 갈망이 식지 않도록 인도적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둘째, 국제사회의 협력을 이끌어 내야 한다. 물론 주변국들이 핵을 가진 통일한국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이 먼저 핵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셋째, 북한체제의 연착륙을 유도하고 통일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남북교류를 확대하고 북한이 개혁개방에 동참하도록 도와야 한다. 통일은 민족분단의 비극을 치유하는 유일한 길이다. 외세에 의해 강제로 분절된 민족 공동체를 복원하여 군사적 대치에 의한 과도한 안보비용을 줄이고, 남북간 이산된 자원, 인재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며 국토분단에 의한 국제관계 부조화를 해결하여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홍익인간의 이념을 구현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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