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묵 대전·충남 경영자총협회장
|
이즈음 가장 바쁜 사람은 농부가 아닐까. 있는 손 없는 손 다 내어 겨우 벼 나락을 거두어들이고 나면 저녁연기가 마을을 덮는다. 한숨 한번 들이쉬고 옷가지에 묻은 터럭을 훌훌 털어내니 막걸리가 목구멍을 넘는다. 터럭이 불에 타듯 하루의 피로가 녹아내린다. 지금이야 기계화되어 논에서 벼 베기에서부터 타작까지 하나의 공정으로 마무리되지만, 옛날에는 그게 아니었다. 논에서 들인 볏단을 쌓아 볏가리를 만들면 마당에 산이 하나 생겼다. 그것을 여러 날을 두고 벼훑이에 털어내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좀 지나 회전기가 들어와 타작을 하게 되면 와랑 와랑 동네가 흔들렸다. 지금처럼 혼자 기계를 움직이지 않고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돌아가며 품앗이로 타작을 했던 것이다. 일하는 사람의 식솔까지 다 와서 끼니를 나누며 가을걷이를 했다. 식솔이 많이 오든 적게 오든 입에 담는 법이 없이 즐겁게 밥숟가락을 나누었다. 오히려 타작하는 날은 일꾼들보다 밥해 내야 하는 아낙들의 손길이 더 바빴다. 그래도 아무도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으며 즐거워했다.
타작이 끝나면 자연스레 김장을 해야 한다. 더 이상 배추와 무가 누런 잎이 되기 전에 버무려 넣었다. 배추를 수확할 때는 다섯 살 코흘리개도 제 머리통보다 큰 가을을 옮겨야 했다. 온 가족이 동원되어 즐겁게 배추 수확을 하고 나면 배추 뿌랭이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며칠 밤 마련한 양념으로 동네 아낙들이 모여 배추를 버무렸다. 걸쭉하게 나오는 동네 입담은 장날이다. 혼자서 끌고 가는 입담이 그칠 줄을 몰랐다. 동네 과부와 홀아비가 입방아에 오르고, 자연스레 제 시어미 얘기로 넘어갔다. 이쯤 되면 이웃 아낙이 양념에 절인 배춧잎을 뜯어 입담의 입에 우겨넣었다.
어떤 일이든 네 집 내 집 가릴 바 없이 공동체로 이루어졌었다. 그들의 삶의 즐거움은 언제나 함께 있음에서 비롯되었다. 같이 일하고, 같이 놀고, 같이 노래하고, 같이 울었다. 네 집 김장 맛이나 내 집 김장 맛이나 대동소이했다. 버무린 사람이 같으니 같을 수밖에 없었다. 겨우 나는 맛의 차이는 넣은 재료 차이와 저장 방법이었다.
요즈음은 어떤가. 돈을 벌려면 아낙들의 손을 가볍게 해 주어야 한다면서 편리한 살림도구를 많이도 만들었다. 참으로 아낙들이 살 만한 세상이다. 옛날에 비해 여인들의 일손이 많이도 줄었다. 냉장고의 등장으로 주방의 일이 현격히 줄었고, 세탁기의 등장으로 빨래를 머리에 이고 냇가로 나갈 일도 없어졌다. 하지만 그녀들의 행복지수는 옛날보다 훨씬 높은가 묻고 싶다.
김치도 슈퍼에서 구입하면 된다. 어쩌다 김장을 한다 해도 절인 배추를 집에까지 배달해 주는 세상이다. 모두가 편리해졌지만 행복은 따라오지 않은 것 같다. 가정생활도 제 홀로이고, 먹고사는 일도 제 홀로이다. 생업을 해도 제 홀로 구상하고, 제 홀로 추진하며, 제 홀로 이득을 계산한다. 남의 간섭 받을 일 없으니 마냥 행복해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제 혼자의 삶은 편리할지 모르나, 그것 자체가 행복은 결코 아니다. 행복은 언제나 나눔이라는 인간의 교감에서 배가된다. 이런 과정이 동반되지 않으면 진정 행복한 삶은 찾아주지 않는다. 늘 나눔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됨을 유념할 일이다. 문득 이 가을의 중턱에서 편리와 행복의 또 다른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김장을 담가 버무린 배추가 자연스레 이웃집 담을 넘나들던 적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이벤트성으로 김장 나누기 행사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옛날에는 자연스레 웃으면서 이루어지던 일들이 요즈음은 얼굴 내기의 수단으로 바뀌었다.
시골집 마당에 둘러앉아 김장을 버무리며 왁자하게 떠들던 어머님 세대의 행복을 그리워한다. 네 것 내 것 가리지 않고 함께 나누며 진정한 즐거움과 행복을 누리셨던 그 시절의 풍습이 다 어디 갔을까. 한 달의 발품을 내어 찾을 수만 있다면 한번 나서 보고 싶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