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권 목원대 총장 |
그런데 읽고 쓰고 말해야 할 대상이 책만은 아니다. 세계도 하나의 텍스트라는 것이 철학적 정설이 된 지 오래이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서 인식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먼저 언어를 통한 구별이 필요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다른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의 정체성을 갖게 되기 때문에, 세상사 역시 한 권의 책처럼 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맥락을 철저히 따져봐야 한다.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도 세밀한 독법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대학의 공부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을 터득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맹률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낮은 상황에서, 고작 대학에서 배우는 것이 그것이라 한다면, 대학은 별 것 아닌 것을 가르치는 곳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일지 모르지만, 그것을 제대로 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 텍스트가 책만이 아니라 현실세계일 땐 더욱 더 그렇다.
공청회 같은 델 가보면 가장 쉬운 것 같아 보이는 제대로 말하기조차도 결코 녹녹치 않은 일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그곳에서는 대체로 주제 발표자가 발제를 하고 그것에 대해 다른 전문가가 그 내용을 요약하여 말한 후 문제점을 지적하고 다른 의견을 더 들어보기 위해서 방청객에게도 질문할 기회를 준다. 그런데 대개 이런 모임은 시간을 넘기기 일쑤여서 사회자가 발언자들의 말을 중간에 끊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공청회는 예정 시간 보다 몇 곱절은 더 걸리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 발언하는 사람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보면 논리적 타당성은 차치하고라도 한 두 마디면 가능한 얘기를 아주 장황하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들이 긴 것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주제와 관련된 핵심적인 내용만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논의가 가능했을 공청회는 그야말로 “아무 뜻도 없는, 소음과 분노만 가득한 백치(白痴)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끝나는 일이 자주 생긴다. 거의 배우지 않고서도 할 수 있는 말조차도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읽고 쓰는 것은 또 어떤가? 똑 같은 책을 읽고도 사람마다 이해의 차이가 심해서, 어떤 사람은 아주 피상적이고 지엽적인 내용을 말하면서 어떤 책이 감동적이었다고 말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필자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내용으로 그 책을 이해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선진 외국에서도 학생들이 책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인터넷에 있는 글들을 대충 짜깁기해서 학습보고서를 대신하려는 경향이 있어, 구글 대학(Google university)이란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그 자체가 비교적 자세히 설명해주려는 목적에서 쓰인 책도 이럴진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 현실의 텍스트를 읽는 것은 더 어려울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의 바른 독해가 나의 안녕과 직결된다면 결코 남의 글을 짜깁기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 그것이다.
현실이란 책은 현실에 참여함으로써만 제대로 읽을 수 있다. 도서관에서, 그것도 현실과 동떨어진 수험 서적 같은 것만을 읽어가지고는 더더욱 부족하다. 책도 열심히 읽어야 하겠지만, 가능하면 조그만 동아리 모임에라도 참여하여 그곳에서 어떤 일을 조직해보고 발표하고 토론해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책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현실에 좀 더 폭넓게 참여하고 경험함으로써 세상이라는 더 큰 텍스트를 제대로 읽고 어렵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 제대로 쓰고, 제대로 말하는 법을 터득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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