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최근 화제를 부른 '러버덕'에 관한 이야기로 그때 못한 작품 감상의 실마리를 풀어볼까 한다.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하기 전에는 필자만 모르는 인기 멜로드라마 제목 러버덕(lover duck)이 아닐까하는 추측이었다. 알고 보니 네덜란드의 설치미술가인 '플로렌타인 호프만'이 제작한 초대형 고무오리조형물 작품 제목 '러버덕(rubber duck)'이란다. 알려진 대로 설치미술작품 '러버덕'이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많이 보아왔던 장난감 오리인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호프만이 독창적으로 제작한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리지널 러버덕은 '피터 가닌' 이란 조각가가 이미 1940년대에 물에 뜨는 오리 모양의 작품을 처음 만들어 특허를 받은 것이라 한다. 이후 전 세계로 퍼져 많은 어린아이들의 물놀이 장난감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렇듯 설치미술작품 러버덕은 호프만이 직접 창안한 것도 아니고 직접 제작하지도 않은 것이다. 기껏해야 자신의 작품을 위한 창작행위는 '피터 가닌'의 작품을 커다랗게 확대시키는 아이디어뿐이었을 터다. 원작일점주의의 신화를 속절없이 무너뜨리며 작품이라 주장한다. 이보다 지독한 표절은 없음에도 수많은 사람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얼까.
호프만은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크기로 제작된 러버덕을 서울 석촌호에 설치하여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어마어마한 크기로 제작된 오리인형은 자그마한 크기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시선을 단박에 끌어 모은다. 오리인형의 커다랗고도 선한 눈망울을 보고 있노라면 포근하게 안아주고 싶은 심정이 인다. 밝고 선명한 색상은 멀리서도 한 눈에 띤다. 사랑스러운 괴물이 아닐 수 없다.
작품(作品)이란 '사람이 도구를 이용하여 만든(作) 물건(品)'에 다름 아니다. 나아가 예술가 고유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동원하여 만든 그 무엇이 작품인 것이다. 독창적인 창작행위의 결과물, 작품은 다른 것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그런데 100여 년 전 마르셀 뒤샹은 작품제작에 작가의 직접적인 수고, 노동력을 동원하지 않고 무언가의 선택 또는 아이디어만으로 작품이 될 수 있다는 파격으로 예술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뒤샹의 문맥으로 호프만의 작품을 바라본다면 '러버덕'의 이해에 쉽게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친밀한 인형의 크기를 거대하게 부풀린다. 이를 눈에 띄기 좋은 장소에 세워 놓아 그 위용을 뽐내며 세간의 시선을 사로잡게 한다. 같은 물건이라도 그 규모를 달리해서 보여줄 때 흠칫 놀랬던 경험을 되새기게 하면서. 어린아이의 물 놀이터에나 있어야할 오리인형이 드넓은 호수 한복판에 성큼 자리 잡으며 시선을 집중시킨다. 원래 있어야할 곳을 떠나 엉뚱한 장소에 자리했을 때의 낯설음이 신선한 충격을 던진다. '낯익은 것들을 낯설게' 보여주는 것이 현대미술의 효과적인 전략임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예술에는 이미 익숙해져 간과하기 쉬운 사물 또는 경험의 숨겨진 매력을 들춰내는 힘이 있다던가. 작가는 순간의 통찰을 작품으로 변환시켜 이미 길들여져 지나치기 쉬운 경험의 숨겨진 매력을 일깨우기도 한다. 일찍이 마르셀 뒤샹은 작품을 어떻게 만드느냐(作)에서 어떻게 평가(品)를 받는가하는 문제의식의 이행으로 미술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질문으로 미술을 골칫덩이로 둔갑시켰다.
호수 위에 러버덕을 띄워놓고 “즐거움을 전 세계에 퍼뜨리며 전 세계의 긴장이 해소되길 기대한다”며 작품의 의미를 찾는 호프만의 천진난만한 예술행위가 얽히고설킨 총체적난국에 자그마한 위안이 되길 기대해본다. 예술에는 분명차원이 다른 치유효과가 있음을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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