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훈 한남대 경영학과 교수 |
왕자시절에 인질 친위대로서 살인병기의 경험을 한 블라드 는 안하무인격인 오스만 투르크의 사신들을 죽이고 선전포고를 하면서 그들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10만 명의 압도적인 군사력의 투르크 대군을 물리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어쩔 수 없이, 그는 전설 속 악마를 찾아가 절대적인 힘을 얻고 자신을 담보로 한 위험한 계약으로 스스로 어둠의 존재가 되는 것을 선택해서 이기는 내용이다. 이 내용을 보고 술탄의 인질친위대에 약소국인 우리로서는 많은 공감이 간 내용이었다. 특히 조선시대에서 명과 청에게 사대를 하면서 많은 굴욕과 치욕을 겪은 우리로서는 공감에 앞서 많은 생각을 갖게 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왕이 적국의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당한 우리로서는 드라큘라의 내용을 더욱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머리가 땅에 조아릴 때 머리 찧는 소리가 높은 자리의 청태종 홍타이지(皇太極)에게 종치는 소리처럼 들리도록 요구하며 패전국의 왕 인조는 이로 인해 머리는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에 관해서는 서울 송파구 송파동 에 있는 삼전도비(三田渡碑)에 인조가 청태종 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절을 하는 내용을 적어놓았는데 본래의 비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이런 내용을 보고 흥분하였더니 필자와 절친인 P역사 선생님이 알려준 내용이다.
“대청(大淸) 숭덕(崇德) 원년(元年) 겨울 12월에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께서 우리가 먼저 화약(和約)을 깬 까닭에 처음으로 진노(震怒)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오셨다. --이때 우리 임금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두려워하기를 마치 봄날에 얼음을 밟고 햇빛을 기다리는 듯이 하였다. 황제께서 지극히 인자하시어 은혜로운 말을 내리시니 열 줄의 조서가 밝게 드리움에 엄숙하고도 온화했다(皇帝孔仁 誕降恩言 十行昭回 旣嚴且溫).” 더욱 우리를 흥분케 한다.
이것이 역사인가, 치욕인가. 하지만 P선생님은 국보9호인 부여정림사지(扶餘定林寺址)5층 석탑에 씌어 있는 대당평제국이란 글은 더욱 우리를 분하게 한다고 하며 알려 주었는데 그분의 해석인 즉, 大唐平百濟國(대당평백제국)위대한 당나라(大唐)가 백제국을 평정(平百濟國)하고 기념으로 탑에 새긴 글(碑銘)이란 내용이다.
반도의 오랑캐가 만리 밖에 떨어져 천상을 어지럽게 하고 정사를 그릇되게 하여 백성이 원망하니 우리 황제가 형국공 소정방으로 하여금 원정케 하였으니-- 해석해주신 분은 의자왕 까지 잡아가고 수만명 이 당나라로 끌려가는 치욕을 겪었다하며 흥분하였으나 역시 어언 1450년이 지나다 보니 분하다는 내용보다는 역사속의 한 줄거리로 인식되고 있는 느낌이다. 치욕이나 굴욕도 시간이 가면 잊혀지는 것인가?
삼전도비도 약 425년이 지났으니 이것도 잊혀지고, 약70년이 지난 일본식민지도 잊혀지는 것인가? 지금 우리나라를 업신여기는 일본의 위안부문제도 36년간의 식민지를 겪은 것의 일부인데도 이를 부정하는 일본의 모습에 모두가 분해하며 흥분하는 것은 아마도 이처럼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굴욕의 역사이고 잊고 싶은 치욕의 역사이지만 후일에 이런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사실도 우리가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인데 약소국에서 강소국으로 탈피하려면 우리 국민전체를 아우르는 타협과 통합 속에서의 혁신을 중심으로 부정과 부패를 없애고 경제적 성공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길로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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