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윤수 대전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
얼마 전, 1954년 《신천지》라는 잡지에 실린 노도양(道陽, 당시 충남대 교수) 선생의 글 <중도(中都) 대전>을 읽었다. 1950년대 초반 대전의 모습을 기록한 글이다. 거기 '왜색상존(倭色尙存)'이라는 꼭지에 이런 내용이 있다. '대전은 일본인들이 개척한 도시로 아직도 왜색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물질적 왜색은 문제시하고 싶지 않다. 그런 건 낡으면 허물어질 테고 또 언제든 없앨 수 있다. 그것보다 우려되는 것은 의식들이다. 극단적인 관료주의, 추세(追世)주의, 아부풍들이다.'
나는 노교수의 글을 읽으며, 우리의 사고가 50년대보다 결코 앞서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최근까지도 20세기 초중반에 지어진 건축물들을 일제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없애 왔다. 필요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건물 몇 채 부수는 걸로 일제를 극복했다 득의양양 하는 것은 우스꽝스럽고 서글픈 일이다. 그건 정작 중요한 문제들을 가려버리는 일이 될 수 있다. 노교수가 지적한 것도 바로 그것일 것이다.
역사는 결코 청산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굳이 표현을 찾는 다면 청산(淸算)이 아니라 '정산(精算)'이 맞다. 깨끗하게 치워버린 것에서 우린 다시 무엇을 성찰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건축에는 죄가 없다.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이 땅에는 우리가 살았고, 그 건축물들은 모두 우리가 짓고 사용한 것들이다. 그 시대의 기술과 노동, 의식과 미학 등이 담긴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유산이다.
이런 미망을 깨고 보면 근대문화재의 매력은 크다. 우선 우리 일상에 가장 가까이 들어와 있는 문화재이며, 박제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와 함께 숨 쉬고 나이를 먹어가는 문화재들이다. 가끔 문화재를 보존한다는 것의 본질적 의미를 묻는다. 나는 결국 문화재 보존은 오래된 물질적 대상 하나를 계속 남겨두는 게 아닌, 그 물질적 대상과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모든 관계, 이를테면 공간에 대한 기억과 추억, 그것과 맺어온 삶의 방식들을 기록하고 지켜내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건물 하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 안팎에서 이루어진 그만의 소통방식, 아무리 소소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생산해 낸 유일무이한 흔적과 기록, 즉 그 삶을 보존해야 하는 것이다.
대전의 원도심은 매력적인 곳이다. 그 매력을 만들어내는 가장 큰 자원은 근대문화재들이다. 근대문화재들은 원도심의 경관을 풍요롭게 만들고, 독특한 공간의 구조와 질서를 지켜내는 역할을 한다. 경험해 본 사람은 안다. 원도심을 걸을 때는 낮은 하늘을 볼 수 있고, 좁은 골목들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가장 가깝게 만나며, 위압적인 마천루가 아닌 인간의 몸에 가장 잘 맞는 이른바 '휴먼스케일'의 건축물들이 주는 안정감이 어떤 것인지.
내년도 대전시에는 도시재생본부라는 새로운 조직이 만들어진다. 대전시의 공무원이 아닌, 대전 시민의 한명으로 그 역할에 조심스러운 기대와 바람을 가져본다. 신설되는 조직이니 의욕도 클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보다는 먼저 일정한 가이드들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를테면 '무언가를 채우기보단, 비워냄으로써 본래의 가치를 드러내자' '지형과 공간구조를 훼손하지 말자', '삶의 형태를 보존하자', '자본이 아닌 사람을 우선하자' 같은 것들이 그 안에 포함되었으면 좋겠다. 재생, 그것은 무언가를 보듬어 다시 살린다는 뜻이지, 부수고 다시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의 원도심은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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