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환 (재)농어촌환경기술연구소 고문 |
이른 아침 새와 벌레들의 노래 소리가 시작되면 동녘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해가 붉다 못해 누렇게 이글거리며 희망찬 옥가실의 아침을 열어준다. 생동감 넘치는 환상의 해돋이와 함께하는 옥가실은 축복이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지천(之川, 금강의 지류)에서 아침에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망월산과 꾀꼬리봉을 바다위의 섬처럼 만들면서 강물 따라 금강 쪽으로 서 있는 듯 천천히 흘러간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동양화 같다.
하루에 한번 아침 8시 반에 버스가 마을회관까지 들어온다. 이 버스를 기다리는 어르신들이 아들집, 딸집에 직접 가지고 가거나 택배로 부치러 가는 짐들이 바리바리 많다. 올해 수확한 참깨도 있고, 고추도 있고, 묵직한 밤 자루와 콩도 있다. 시골의 부모들은 가을에 자식들에게 주려고 텃밭에 이런저런 농사를 짓는단다. 허리가 아프고 무릎관절로 농사일이 힘들지만 자식들을 위한 본능이고 보람이기 때문에 즐겁고 행복할 뿐이란다. 인정이 넘치고 순박한 삶의 모습이다.
마을주변 산에는 모두 밤나무가 심어져 있어 농가의 대부분이 밤농사를 짓고 있다. 밤농사는 일반적으로 해마다 가지치기를 해주고 두 번 정도의 거름을 준다. 병충해예방을 위하여 항공방제를 하지만 필요하면 농가에서 추가방재도 한다. 추석 전후에 밤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한 달 정도 밤 수확을 한다.
밤 수확은 다른 과수와 다르게 알밤이나 밤송이가 떨어지면 줍기만 하면 되지만 밤 줍기는 밤농사의 마지막 작업이면서 클라이맥스다. 밤은 크고 무거워야 값이 나가고 변질되거나 벌레 먹은 밤은 값을 못 받기 때문에 떨어진 밤을 빨리 주어서 수매(收買)해야 한다. 하지만 밤 줍기에 일손이 모자라 마을에 사는 남녀노소 모두가 밤 줍기에 나서야하고 인근 지역이나 도시에서 일꾼을 조달하기도 한다. 마을에서 일꾼을 구할 수도 없지만 우리 밤 밭은 규모가 작아서 일꾼을 사서 밤 줍기를 할 정도가 안 되어 나와 아내가 직접 수확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한 해 동안 땀 흘려 얻는 수확의 기쁨은 체험에서만 느낄 수 있다. 아마추어농사꾼도 익숙하지 않은 육체노동이라 몸은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살아 있는 자연 속에서 땀 흘리며 일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흐뭇한 성취감도 느낀다. 가을 내내 옥가실 사람들의 얼굴이 밝고 활기찬 모습은 풍성한 수확의 기쁨으로 행복하기 때문일 것이다. 해 뜰 무렵 밤을 줍다가 숲속에서 이름도 모르는 새가 노래를 한다.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 지저귀는 노래 소리가 신비롭게 아름답고 상쾌하다.
노래의 소절(?)마다 소리의 강약이나 높낮이가 서로 다른 3개의 소절로 된 노래를 한다. 그리고 같은 노래를 3~4회 반복한다. 세 소절로 된 유행가를 세 네 번 반복해서 부르는 것 같았다.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서 운다는데 아침 먹으러 가자고 짝을 부르는 언어 같다는 생각도 되지만 지친 내 몸에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옥가실의 가을이 깊어지면 마을회관 마당에 있는 느티나무꼭대기부터 짙은 녹색잎사귀가 노란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느티나무단풍은 점점 나무 아래로 내려오면서 노란느티나무로 바뀌어 간다. 설악산 단풍이 산꼭대기에서부터 물들기 시작하여 산 아래로 내려오듯 말이다. 노란단풍이 가장 낮은 가지의 잎사귀까지 내려올 무렵 느티나무 꼭대기의 노란 단풍잎은 갈색으로 변하고 갈색 잎이 나무 아래로 조금씩 내려오면서 풍성했던 옥가실의 가을은 쌀쌀한 겨울바람에 밀려 막을 내린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