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묵 대전충남 경영자총협회장((주)기산ㆍ경림엔지니어링회장) |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잠시 공주에 들렀을 때 우성면 목천리 근처에 사는 임씨 댁에서 콩고물에 무친 떡을 진상하였다. 왕은 시장한 참에 연거푸 몇 개를 먹고, 떡 이름을 물었으나 아무도 이름을 대지 못하였다. 실은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왕은 이 떡이 임씨 댁에서 진상하였음을 알고 맛이 절미여서 '임절미'라고 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임절미'는 발음하기 편하게 '인절미'로 바뀌었고, 오늘에 와서는 공주의 맛 '공주떡'이 되었다는 기록이다. 이괄의 난으로 궁궐을 내놓고 피신한 몸이 얼마나 허기졌을까. 그 허기를 달래주던 인절미였으니 가히 그 맛을 짐작할 수 있다. 난으로 피신한 왕의 지친 육신을 달래주던 인절미는 한 나라의 왕의 생명줄을 이어준 의미 있는 떡인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까부터 비문의 앞부분에 적힌 '인절미는 찹쌀을 시루에 익힌 다음 그것을 절구에 찧어'라는 구절에 자꾸 끌려가고 있었다. 찹쌀로 만들어서 아주 끈기가 있고 차지다는 의미가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떡의 차짐으로 하여 아픈 삶을 마무리한 분이 내 주위에는 있기 때문이다. 인조에게는 처절한 상황에서 목숨을 이어준 절미인 떡이었지만, 그에게 있어서 이 떡은 먹다가 기도가 막혀 한 많은 생애에 차단기를 내리게 한 모진 떡이었던 것이다.
내가 아는 그는 사업에 실패하여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지인을 찾아갔다. 은행 빚이라도 내어 재기하려 하나 그마저 불가능하자 보증을 부탁하러 온 것이었다. 부탁을 받은 이는 고민하다가 한 가정을 일으키는 일이어서 보증을 서주었다. 그런데 그후에 그가 그만 인절미를 먹다가 고인이 되어 버렸다. 그토록 힘든 세상살이에 지쳐 이젠 인절미 한 쪽을 넘기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이다.
보증인은 책임져야 할 금전적 부담도 있었지만 그보다 남겨진 가족들의 생계가 걱정이었다. 느닷없는 가장의 떠남으로 생활은 막막할 것이고, 이리저리 걸려 있는 빚쟁이들의 분노한 눈빛은 어찌 감내할 것인지…. 자신의 힘으로는 남겨진 가족들을 도울 방도가 서지 않자 보증인은 자문을 받아서 가압류에 동참했다. 벌써 여러 명의 채권자들이 자신의 피해액을 줄이기 위해 가압류 신청을 낸 상태였다.
은행에서는 망자의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보증인에게도 일정의 금액이 주어졌다. 이 돈이나마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전달하려고 연락을 취하던 보증인은 그만 낙담하고 말았다. 가족이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이 온통 빚만 남겨놓고 떠났으니, 연락이 온들 어느 하나 좋은 소식이 있겠는가. 오히려 짊어져야 할 부담만이 늘어날 것이니 아예 세상과 두절하고 사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남은 가족들을 찾던 보증인은 자신이 몇 날 며칠을 두고 찾다가 겨우 찾아낸 가족들은 아주 먼 시골에 들어가 숨어 살고 있었다. 개봉도 하지 않은 전액을 유족들에게 전달하였다. 뒤늦게 가족들은 보증인의 깊은 뜻을 알고 감사의 전화를 하였다.
왜 그 허기진 사람의 인명을 구하는 떡이 이 집안에는 구차한 목숨마저 앗아가는 떡이 되었을까. 분명 떡을 먹는 방법에서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똑같은 것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현저한 차이를 나타내는 것인가 보다.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도 남을 배려하고 사는 사람은 많다. 아직 우리의 사회에는 희망이 있다. 더욱 더 밝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 스스로 힘을 보태야 한다. 나의 조그마한 손길이 이 사회를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세상이 되어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도 웃으며 활기찬 삶에 동참하고 희망을 꿈꿀 수 있다. 남겨진 가족들이 편안히 전화를 받을 수 있는 날이 하루 속히 찾아오기를 기원하며 금강 줄기를 바라본다.
금강교 위에 사람들이 운집해 있다. '공주 인절미 축제'가 한창인 모양이다. 나도 어느 새 그 대열을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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