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용 대표이사는 1955년 강원도 원주 출생으로 서울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석사 학위, 연세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8년 행정고시(22기)에 합격 후 1979년 보건복지부 행정사무관으로 공직에 입문, 보건복지부 국민연금심의관, 보건복지부 건강보험국장,사회복지정책본부장(실장), 식품의약품안전청 차장, 한국보건복지인력개발원 원장, 우송대 사회복지아동학부 교수를 역임했다. 근정포장과 홍조근정훈장을 받은 이 대표는 보건복지부 고위공무원과 산하기관장, 교수로 활동하면서 체득한 원만한 조직 운영은 물론 실전에서 쌓은 사회복지 관련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전문가로 손꼽히고 있다. |
●대한민국 사회복지학의 선구자 - 이상용 대전복지재단 대표이사
“행복한 첫걸음의 시작을 알립니다.”
정진철 대전복지재단 초대 대표이사의 청와대 인사수석비서관 발탁으로 공석이었던 대전복지재단 2대 대표이사에 이상용 우송대 사회복지아동학부 교수(59)가 지난달 17일 취임했다. 대전복지재단 이사회가 지난달 1일 사회복지 전문가인 이 교수를 신임 대표로 결정한데 따른 것이다. 지난달 17일부터 공식업무에 들어간 이상용 대표이사를 지난 10일 대흥동 대림빌딩 10층 대전복지재단 대표이사실에서 만나 대전복지재단 대표가 된 소감과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편집자 주>
▲작은 행복 찾기=“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가까이 있는데 놓치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전복지재단이 할 일은 가까운 곳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작은 행복들을 찾아가는 그런 삶이 가능하도록 도와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선한 인상과 온화한 성품이 편안한 느낌을 주는 이상용 대전복지재단 대표는 이렇게 대전복지재단의 역할에 대해 의미를 부여한 뒤 “좋은 분들과 한가족이 되어 삶을 나눌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고 말했다.
▲한국형 복지정책을 만든 주인공=이상용 대표는 보건복지부에서 일하는 동안 사회복지 전담공무원제를 만들고, 시·군마다 복지관을 하나 이상 세우고, 의료건강보험 통합작업에 참여한 우리나라 사회복지정책 행정의 베테랑 실무자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졸업 후 사회복지학으로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보건복지인력개발원 등에서 근무해온 지난 30년 동안 한국형 복지정책을 만들기 위해 열정적인 시절을 보냈다. 최근까지는 우송대에서 새내기 사회복지인을 키우기 위해 열심히 물을 주고 싹을 틔웠다.
▲석화리의 추억=2010년 겨울 서울에 있던 보건복지인력개발원이 충북 오송으로 옮기면서 4년째 충청도 생활을 하고 있는 이 대표는 찬바람나는 벌판같은 곳에 덩그러니 서있던 건물을 직원들과 땀흘리면서 아름답게 만들었던 지난 시절을 이야기했다.
농촌마을 석화리에서 2년 반을 산 이 대표는 석화리에서의 추억이 많다. 동네 어르신들과 친부모 자식처럼 돈독하게 지낸 그는 영화 볼 기회가 없는 어르신들을 집으로 초청해 영화를 상영했고, 맛있는 간식거리도 챙겨드렸다. 이 대표 집은 동네 어르신들이 하루 한번씩 들르는 사랑방이 됐다. 이 대표가 우송대 교수 초빙을 받아 대전으로 이사오게 됐을때 동네 노인회장을 비롯한 마을 어른들이 이 대표 부부와 함께 점심을 먹고 감사패를 전달해 주셨다. 마을이 생긴 이래 처음이라고 했다.
▲대전에 오기까지=“대전에는 지난해 5월에 이사 와서 가을부터 우송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왜 그리 어려운 학생들이 많은지. 학비 조달은 어렵고 꿈은 사라져버린 청춘들. 그 아이들을 붙잡고 기도하면서 주저앉지 말라고, 꿈은 이루어진다고 그랬지요. 그런데 이리로 옮기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지금도 그 아이들의 물기 젖은 눈망울이 눈에 선합니다. 나이가 들면 사람은 변화를 싫어하고 제자리에서 맴돌기를 좋아하는데 저는 이렇게 여기까지 와있네요. 그냥 있으면 더 편할 수도 있는데.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물주고 싹틔우는 일을 계속하라고 그런가봐요. 감사하게도 제가 가는 곳마다 좋은 직원들이 함께 해주어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어요. 열심히 함께 해준 직원들에게 지금도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행복한 첫걸음=“저는 이제 대전복지재단 대표이사로 행복한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그렇게 함께 가면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상생과 협력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70년이 걸렸다고 말씀하셨죠. 저는 그 사랑이 아직 머리에서 영글지도 않았는데 가슴에서는 빨리 싹을 틔우라고 그러네요. 저 혼자 가슴으로는 못하지만 우리 모두 힘을 모으면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구석에서 외롭게 홀로 우는 직원이 없도록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살고 싶습니다. 누구나 희망을 잃지 않고, 아무도 소외되지 않는 대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대전을 살기 좋은 복지도시로 만들 수 있도록 많은 지지와 격려, 때로는 호된 질책을 아낌없이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변화와 소통으로 보답해드리겠습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서울대 진학 후 행정고시에 합격하기까지=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7살부터 주로 서울에서 자란 이 대표는 전남 함평이 고향인 아버지가 육군 장교로 근무하셔서 가족이 전국 곳곳을 이동해 살기도 했다. 아버지가 군 제대 이후 사업을 시작하면서 서울에 정착하게 됐지만 아버지의 사업이 계속 실패하면서 가세는 점점 기울어졌고, 이 대표는 가난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그가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전기도 없고 물은 멀리 떨어진 공동수도에서 길어 마셔야 하는 산동네에서 살았다. 그는 꽤 오랫동안 하교 후 식구들이 먹을 물을 물지게로 지고 날라야 하는 날들을 보냈다.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공부한 덕에 경동고 졸업 후 1974년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입학했다.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 독재 타도를 외치던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이었던 터라 학생들은 매일 데모를 했는데, 이 대표도 그중 한 명이었다. 학교는 자주 휴교를 하곤 했고, 아무런 좌표도 없는 방황의 세월을 보냈지만 다행히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행정고시(22회)에 합격했다.
▲국립재활원에서 천사같은 아내를 만나다=이 대표가 보건복지부에서 잠깐 근무한 후 3년 8개월의 육군 장교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뒤 근무한 곳이 보건복지부 소속 국립재활원이었다. 당시는 국립각심학원(1986년 폐지)이란 이름으로 지적장애인을 보호하던 곳이었다. 지적장애인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그는 발령 직후 모교인 서울대에 부탁해 지적장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소개받았는데 그녀가 바로 지금의 부인 문정희씨다. 당시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생이었던 부인 문씨는 장애인복지에 대해 해박할 뿐만 아니라 신앙심이 투철했다. 천사처럼 착한 아내를 만난 뒤 이 대표의 인생은 완전히 변했다. 10년 이상 방황했던 시절을 끝내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면서 사회복지를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각오를 했고, 아내를 따라 교회에도 다니게 됐다.
▲보건복지부에서 30년=이 대표는 약 30년 동안 보건복지부에서 복지정책, 건강보험, 국민연금, 보건 분야 업무를 맡았다. 국립의료원에서도 근무했던 이 대표는 오랫동안 공직에 있으면서 현재 우리나라 복지전달체계의 상당 부분에 관여했다. 사회복지전담공무원제도가 1987년에 처음 시작될 때 산파역할을 했고, 사회복지관을 전국 시·군·구에 확대하는 계획을 세웠다. 지금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상징인 사랑의 열매를 만드는 작업도 그의 손을 거쳤고, 건강보험 격동기인 1998년부터 소위 '건강보험 통합' 작업을 할 때는 그가 주무과장이었다. 그는 암환자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제도와 장애인이 타는 스쿠터나 휠체어를 건강보험에서 지원하는 제도도 만들었다.
▲합리적인 원칙주의자=이 대표는 '원칙주의자'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때로는 '합리적이다'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가끔은 '공무원 같지 않은 공무원'이라는 말도 들었다. 토론을 좋아해 전직원들이 정보를 공유하도록 했다.
“보건복지인력개발원장으로 있을 때에는 매주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서 저의 살아가는 모습이라든지 현재 하고 있는 생각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곤 했습니다. 직원들도 편하게 답장을 보내 직장에서의 고충이나 좋은 의견도 함께 보내주었죠.”
▲대전복지재단에서 복지정책 실현 돕는다=이 대표는 “제가 대전복지재단에서 일하게 된 것은 지금까지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정책을 만들고, 대학에서 가르쳤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대전시민의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라는 소명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며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대전복지재단은 대전시가 복지정책을 보다 미래지향적으로 만들어가도록 그 방향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며 “이중 대전 시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행복지수를 높이는 복지를 위한 정책 제시가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보건복지부에서 많은 복지정책을 만들고 있지만 이 정책들이 대전 시민들의 욕구를 잘 반영할 수 있도록 하고, 우리의 현실에 맞도록 적용하는 역할도 매우 크다”며 “이렇게 하면 우리 대전만의 특성을 잘 살린 복지가 되고, 결과적으로 시민들의 행복을 키우는데 기여하게 된다”고 밝혔다.
▲통합사례관리 확대=이 대표는 “소위 맞춤형 복지인 통합사례관리를 더 확대할 필요가 있다”며 “가난, 질병, 절망 등의 위기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 스스로 일어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런 일에 복지전문가를 투입하면 비용이 들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사회적 비용을 매우 많이 줄이는 것”이라며 “맞춤형복지는 효율적인 복지”라고 말했다.
▲대전복지재단은 여러분야 다양한 계층 고견 들을 것=이 대표는 “지금까지의 다양한 경험이 재단을 이끌어 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보건복지부에서 30년 정도 복지 정책을 만든 경험이 있고, 보건복지인력개발원에서는 복지전문가를 양성했다”고 소개했다. 또 “최근까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사회복지시설과 병원 등 보건 복지와 관련해 다양한 곳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지만 경험이 많다고 곧 지식이 많은 것은 아니다”며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는 지식이 확산돼 있는 만큼 어떤 지식이 특정 전문가의 전유물인 시대는 지났고, 여러 분야 다양한 사람의 고견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대담=한성일 취재 4부장(부국장)ㆍ사진=이성희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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