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규 문화칼럼니스트 |
40년대 말 대흥다리 근처에서 피라미 낚시하던 중학생 때의 내 즐거운 '대전시절 추억'도 이야기상위에 오르곤 했다. 그 냇가에서 놀던 시기가 최박사와 나 사이에 23년의 격차가 있었건만 한밭의 교외 풍경은 큰 차이가 없었다. 깨끗한 모래톱이 있었고 냇물은 수정같이 맑았고 물고기가 흔했다.
그는 서울대 교수로 정년을 마친 뒤 10년 동안 오랜 꿈을 실현하고자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우리 민물고기를 조사했다. 물줄기를 따라 봄부터 가을까지 쉬지 않고 찾아다녔다. 강원도에서 제주도까지 직접 조사하고 확인하고 겨울에는 표본과 옛 기록을 살피면서 연구했다.
피땀 어린 조사 연구의 결실은 모두 7권의 두툼한 책 '한국의 자연-물고기편'으로 완성되었다. 방대한 이 저작은 그를 '민물고기 할아버지' '한국 민물고기 연구의 태두' 자리에 올려놓았다. 물이 있는 곳이면 가리지 않고 직접 찾아다니며 완성한 이 책을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에 버금가는 겨레의 보물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황무지에 가까웠던 한국의 민물고기 연구는 그가 민물고기박사(서울대) 제1호로 나서면서 새로운 맥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낼 때 대전은 넓은 밭이 펼쳐 있는 '한밭'이었다고 했다. 도시 이름을 두고 '대전(大田)이다' '태전(太田)이다' 하면서 논의할 때 최 박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왜 한자를 끌어들여 그러는지 모르겠다. 한밭이란 이름이 얼마나 좋은가? 내 자랄 때는 대전보다 한밭이 더 입에 밴 이름'이었다면서 '한밭'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나라 민물고기 연구의 바탕을 일구고 나서 위기에 처해있던 우리 민물고기 보호와 보존사업, 그리고 청소년교육 활동에 뛰어 들었다. 사단법인 한국 민물고기보존협회를 결성하고 팔을 걷고 나섰다. 나는 '함께 일하자!' '나 좀 도와 줘!'하는 최박사의 반 강요를 거역하지 못하고 거기 협회의 임원으로 끼었다. 그가 세상을 뜨자 '회장 유고 때는 최 연장 이사가 승계한다.'는 정관 때문에 꼼짝 못하고 3년 간 협회 간판을 지켰다. 인연이란 묘한 것이어서 한밭의 냇물인 '산내'가 그를 민물고기 할아버지의 길로 이끌었고, 좋아하던 버드내 한 지류 끝 산언덕이 그의 영원한 쉼터가 되었다. 버드내는 멸종위기 고유어종인 미호종개가 SOS를 보내고 있는 곳이다.
민물고기는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떠날 수 없다. 바다를 거치지 않으면 다른 강으로 옮겨갈 수도 없다. 바다로 가면 죽는다는 걸 아는지, 민물고기는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지느러미를 놀려 상류 쪽을 향해 헤엄친다. 장마로 거센 흙탕물이 밀려오면 강가 풀밭에서 풀잎을 꼭 물고 버틴다. 같은 종이라 해도 사는 강줄기에 따라 유전자가 다르다.
경북 강원 경기도에는 자기 고장 민물고기를 지키고 더 많은 사람들이 물속 세계와 물고기의 생태를 이해하고 여가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민물고기 생태학습관을 운영하고 있다. 일본에는 백여 곳의 이런 관찰시설(수족관 등)이 있다. 금강 수계에 이런 시설이 꼭 있어야겠다며 각계에 호소하여 정부예산이 편성된 적이 있었으나 막상 당해 지자체는 '전액 국고가 아니면 못하겠다'며 예산을 반납하여 무산된 일이 있었다. 10년 전 일이다.
한밭의 물은 모두 금남정맥 신령스런 산줄기가 힘을 모은 신비한 영산에서 발원하고 있다. 대둔산에서 갑내(갑천)가, 금성산과 오대산에서 버드내(유등천)가, 만인산에서 산내(대전천)가 나란히 한밭의 땅을 기름지게 적시고 한밭의 북쪽에서 서로 손잡고 금강으로 합류한다.
최기철 박사가 염원하던 어린이들이 물고기를 쫓으며 툼벙거리고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강변 쉼터와 강변문화와 물고기를 지키는 체험관이 한밭에 들어선다면…. 그의 12주기를 맞으며 '접었던 꿈'이 잠시 눈앞에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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