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곤 대전노숙인종합지원센터 소장 |
개인의 가치나 지향점 혹은 목표로 하는 이익선이 다를 경우 가치의 판단 기준 자체가 상이해지기 때문에 이분법적인 선악 혹은 잘함과 잘못함을 가려내기란 쉽지 않다. 특히 요즘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사회적 이슈에 따른 양자대립구조는 시시비비를 가리기에 앞서 온 국민을 양분하고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다가는 '그냥 귀찮으니 대충 넘어가자'라는 식으로 유야무야되거나 혹은 그냥 잊혀지는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요즘 필자가 일하는 시설에서 직원들과 함께 몇 주째 치열하게 논의하고 있는 논점이 적절한 '아니오'의 시점을 찾는 일이다. 사회복지기관에서 사회복지사가 도움을 필요로 하고 찾아오는 대상들에게 '아니오'를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필자가 일하는 노숙인 시설의 경우 최극단의 상황에서 찾아오거나 다른 사회복지기관에서조차 서비스의 어려움 때문에 거절당하고 찾아오는 경우도 있어 우리 기관에서조차 서비스를 거절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서비스 지원체계가 열악한 노숙인복지 시스템의 특성상 우리조차 이들을 거절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그 동안 어떤 대상이든지 거부하지 않고 서비스를 하려고 노력해 온 계기였다. 하지만 이러한 개방적 형태가 오히려 문제가 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장기 거주자의 의존성 문제다. 필자가 있는 시설은 일시적인 보호를 통해 자립을 준비하거나 노숙인시설로 옮겨가는 중간다리 역할을 하는 곳이지만 일부 장기 거주자의 경우 과도하게 의존적이거나 무기력해서 다른 노숙인 생활시설을 가거나 주거지원을 통한 자립생활조차 거부하는 경우가 있었다.
월 20일 이상 이용하지 못한다는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의존성이 높은 대상들의 경우 20일이 지나면 그냥 노숙을 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설득과 협박(?)도 소용이 없다. 하지만 지속적인 설득을 하거나 이용을 제한하는 것 외에 딱히 방법이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행태는 우리 스스로 이들을 방치하는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자조적 비판이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적절하게 거절해야 하는지, 적절한 거절이 과연 노숙인들의 의존성 탈피와 자립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가 첨예한 논의의 중점이 되고 있다.
사회복지를 필요로 하는 대상들 중에서도 특히 자존감이 부족한 노숙인들은 도움을 청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그래도 기관에 도움을 청하고 자기의 울타리로 삼아 심리적 안정을 찾는다는 것이 고무적인 일이고 자립의 첫 단추가 되기는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장기화되면 의존적이 되고 그 의존성은 노숙인 자신의 자립의지를 흐릿하게 하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새끼들을 독립시켜할 시점을 놓치지 않고 외면해버리는 동물들처럼 어떻게 적절한 시점에서 '아니오'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아니오'를 통해 오히려 자립과 자존의 의지를 강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그동안 우리 기관에서는 모두가 '아니오'라고 거절한 그리고 거절당한 대상자들을 모두 '예'하고 받아들여 세상의 편견과 외면으로부터 도태당한 사람들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가치판단 기준이었다. 그들은 어디에도 설 곳이 없었고 어디에도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모두가 '아니오' 했던 사람들에게 우리는 '예'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오'를 말할 시점을 찾아야 할 때다. '아니오'를 통해 스스로 설 수 있게 하고 스스로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정확한 시점을 찾아 '아니오'를 해야 하는 것으로 가치판단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과제이다. 이것은 노숙인현장 뿐 아니라 사회복지 전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보다 중요한 것이 적절한 그리고 적당한 '아니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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