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욱 복음신학대 대안교육학과 교수 |
영어사전에서 '공감'을 찾아보면 우선 'sympathy'라는 단어가 나온다. 어원을 따져보면 어미의 'pathy'는 그리스어의 'Pathos'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리스 비극을 이야기할 때 흔히 표현되는 그 '파토스'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인간의 정신을 로고스와 파토스로 구분하는데, 이성적인 판단이 로고스라면 그 반대 지점에 있는 인간의 감정이 파토스로 표현된다.
파토스라는 말 자체가 고대 그리스어의 'paschein(받다)'라는 동사에서 왔기 때문에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인간의 마음이 받은 상태, 즉 감정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함께라는 뜻의 'sym'이 더해지면 바로 공감을 뜻하는 Sympathy가 된다. 함께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말이다. 슬퍼하는 사람의 감정을 알아채고 슬프겠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 바로 공감이다.
그런데 영어에서 공감은 'empathy'라는 단어로도 표현된다. 앞서 살펴본대로 감정이라는 의미의 'pathy'를 공통요소로 갖고는 있지만 단어 앞부분은 함께라는 의미의 'sym' 대신에 '내부로 들어간다'는 의미의 'em'이 붙어있다. 단순히 감정을 함께하는 것을 넘어 나 역시 상대의 감정 안으로 들어가 준다는 의미다.
슬퍼하는 사람을 보면서 슬프겠구나 하며 그 사람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sympathy라면 그 사람의 감정 안으로 들어가서 함께 슬퍼하는 것, 그것이 바로 empathy다. 그래서 사전에서는 sympathy에 대해 공감이라는 의미 외에도 '동정/연민'이라는 뜻풀이를 함께 달아놓는 반면 empathy에 대해서는 '감정이입'이라는 의미를 추가한다. 동정과 연민은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한 공감이지만 그 것이 궁극적으로는 내 감정이 될 수 없기에 그 한계를 갖는 반면, 감정이입은 다른 사람의 감정 안으로 내가 들어가 그 감정을 함께한다는 것이다.
'공감'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지향해야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알아채는데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감정을 함께 느끼고 나누는 능력에 있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슬픔을 알아챘더라도 그것이 내 이해관계와 상충될 때 바로 등을 돌리게 된다면 그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공감', 그리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어른'으로서의 가치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감의 능력은 어떻게 길러질 수 있을까? 물론 선천적으로 공감이 잘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기는 하다. 우리가 흔히 사이코패스라고 부르는, 공감의 능력이 병적으로 결핍되어 상식적으로 이해되기 어려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감의 능력은 교육을 통해 분명히 향상시킬 수 있는 영역이다. 로먼 크르즈나릭이라는 영국의 철학자는 공감하는 능력이라는 책을 통해 여섯가지 훈련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첫 번째로는 내 생각을 다른 사람의 시점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두 번째로는 실제로 다른사람의 처지가 되어 그들의 관점을 이해하는 역시사지의 단계다. 세 번째로 이를 위해 내가 평소에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상반된 것에 기꺼이 참여해보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네 번째로 낯선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나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여 듣는 대화법의 연마가 필요하다.
다섯째, 예술, 문화, 영화와 같은 간접경험이 큰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단순히 자신의 공감을 넘어 주변의 공감까지 이끌어 냄으로써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최고의 단계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 마지막 단계까지 올라선 사람들을 우리가 '사회적 어른'으로 존경하고 칭송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고통앞에서 자기의 이익을 내세우며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들의 고통을 내 일처럼 아파하고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 다음 세대를 사회적 어른으로 길러내기 위한 노력에 나서야 하겠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